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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밋너 Feb 23. 2023

제주도에 가서 한 달 살기를 해야겠어

2021년 3월 어느날.

벼르고 벼르던 퇴사를 해낸 뒤, 한 달 정도는 거의 술에 절어 있었다. 내가 그동안 이렇게 많은 사람을 만나고 아끼고 사랑했었나? 스스로의 지난 삶에 대해 돌아보는 시간이 될 정도로, 퇴사 후 한 달 동안은 달력이 빼곡하게 일정으로 가득 찼다. 술 마시려고 퇴사한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물론 그렇지는 않다. 술은 일하면서 더 많이 마셨으니까. 다른 분야의 기자들도 이런지는 잘 모르겠지만-아마 이렇겠지만-스포츠 기자로 산다는 건 일주일에 8번씩 술 먹는 삶을 산다는 것과 대략 비슷한 의미였다. 그때는 그랬다. 지금은 코로나19 이후로 분위기가 많이 바뀌어서 딱히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긴 하지만.


어쨌든, 그 충동은 술에 취한 채 집에 들어와 허물 벗듯 옷가지를 대충 벗어두고 그대로 기절한 뒤 다음날 오전 9시 쯤 느지막하게 눈뜬 3월의 어느 날 찾아왔다. 전날 얼마나 마셨는지도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곤죽이 되어 들어와 베개에 얼굴을 처박고 잔 탓에 코가 얼얼했다. 엎드려 자는 건 건강에 안 좋다는데, 잠결에 그렇게 중얼거렸더니 출근하려던 동생이 어이없다는 말투로 그렇게 처마시는 게 더 건강에 안 좋다-고 쏘아 붙였던 것이 어렴풋이 기억난다.


‘제주도에 가야겠다.’ 그게 그 때 나를 찾아온 충동의 정확한 이름표였다. 나는 이불 위로 껑충껑충 뛰며 나를 짓누르는 그 충동을 힘겹게 붙잡아 끌어안고 충동의 얼굴을 살피기 시작했다. 일곱 살 난 말썽꾸러기, 천방지축처럼 해괴한 표정을 지으며 내 시선을 이리저리 피하던 충동은 머리가 잠에서 깨고, 술에서 깨면서 조금씩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그 충동을 정확히 묘사하자면 이렇다.


‘퇴사한 김에, 제주도에 가서, 한 달 살기를, 해야겠다.’


겨우 몇 마디 더 붙은 문장이 된 것뿐이지만 그 순간 나는 굉장히 명쾌해졌다. 한 달 내내 술 마시며 ‘나는 앞으로 뭘 해야 하지’라는 질문을 던지고, 던지고 또 던지기만 하던 내가 드디어 그에 대한 답변 하나를 거머쥔 셈이었으니까. 그게 비록 장기적인, 그러니까 ‘나는 앞으로 뭐 해먹고 살아야 하지’에 해당하는 답변은 아닐지라도, 서울에서 하릴 없이 백수로 지내게 될 시간 중 한 달을 뭔가 유의미한 유희로 보낼 수 있다는 사실이 마음에 들었다. 


사실 퇴사 후 계획 중에 한 달 살기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순번으로 따지자면 상당히 위쪽에 위치한 항목이었다. 나는 스포츠 기자로 일한 9년여의 시간 중 후반부 2년 정도는 늘 ‘퇴사’에 지향점을 두고 살았고 퇴사를 결행할 구체적인 시점과 퇴사 이후의 계획까지 착실히 세워놓고 있었다. 그 계획을 간결하게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2020 도쿄올림픽을 취재한 뒤 복귀해서 1달 정도 일하다가 사직서 내기→퇴사 후 세계여행(한 달 살기 포함, 후보지:치앙마이(1안), 상트페테르부르크(2안)


이제는 상황이 상당히 달라지고, 코로나19의 위세도 한 풀 꺾였다…기보다는, 팬데믹의 장기화로 인해 사람들이 그만큼 더 둔해져서 내가 회사를 그만 둘 무렵의 분위기와는 사뭇 다르다. 하늘길도 다시 열리고, 이 글을 쓰고 있는 2022년 12월 기준으로 많은 사람들이 다시 해외여행에 나서고 있다. 하지만 내가 회사를 그만 두려고 생각했던 2020년은 코로나19가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고 팬데믹이 선언됐을 무렵이며, 그로 인해 2020 도쿄올림픽도 개최가 2021년으로 연기됐을 무렵이었다.



아직도 잊을 수 없다. 2020년 3월 27일, IOC(국제올림픽기구)와 일본의 아베 신조 당시 총리가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인해 도쿄올림픽의 개최를 1년 늦추기로 합의하고 이를 발표한 날. 나는 어지간한 대표팀 선수들만큼이나 연락을 많이 받았다. “김기자, 올림픽만 하고 그만 둔다고 하지 않았어? 어떻게 할 거야?”, “김기자님, 올림픽도 미뤄졌는데 그럼 계속 일하시는 거죠?”, “올림픽 안 하고 그만 둘 수 있어서 마음이 편하겠네!” 등등등. 그날만큼은 내가 올림피언이 된 기분이었다.


코로나19로 인해 퇴사 후 세계여행의 계획 자체가 불가능해진 시점에서 사직서를 내는 건 아무리 봐도 이득이 없는 선택이었다. 나는 2021년만 바라보며 다시 한번 참기로 했다(아직도 우습기 짝이 없다. 2021년에 열리지만 2020 도쿄올림픽이라는 명칭을 유지하기로 했기 때문에, 내 목표는 변함없이 2020 도쿄올림픽 이후 퇴사하기로 고정돼 있었다. 심지어 2021년이 돼서도 말이다). 


사람 마음이란 참 이상하다. 그 전까지 8년 동안 매년 즐겁게 해왔던 일인데, 그만 두기로 한 일정이 1년 밀렸다고 해서 크게 달라질 것도 없는데 나는 그 1년이 너무 힘들었다. 코로나19로 인해 대면 취재가 불가능해지고, 모든 기사는 전화 취재나 웹서핑으로만 가능한 현실이 나를 두 배로 지치게 만들었다. 결국 스스로 다짐한 1년의 유예를 다 채우지 못하고, 2021년 설 연휴를 앞두고 나는 회사에 사표를 던졌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망설임 없이 회사를 그만 둔 것까지는 좋은데, 뭘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원래 회사를 그만 두고 떠나려던 세계여행이 불가능해지자 당장 할 일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술독에 빠져 있다가 불현듯, 이제까지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었던 제주도 한 달 살기를 떠올린 것이다. 아르키메데스와는 달리 침대 위에 구겨진 채로 유레카!를 외치며 그렇게 마음의 방향을 제주도로 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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