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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밋너 Jan 10. 2024

어떤 기억들이 마지막까지 남아 나를 지켜줄까

피지컬 시어터 <네이처 오브 포겟팅>

* 스포일러 없습니다.

서울자치신문 공연 섹션에 기고한 리뷰(원문 링크)입니다.

연극열전 제공


내 안의 모든 언어들이 힘을 잃고 흐려져 천천히 사라져갈 때, 어떤 기억들이 마지막까지 남아 나를 지켜줄까.


피지컬 시어터 ‘네이처 오브 포겟팅(The Nature of Forgetting)’을 보는 내내 머리에 이런 생각이 맴돌았다. 심장 깊은 곳까지 울려퍼지는 음악을 따라 조기 치매로 인해 뒤엉켜버린 주인공 톰의 기억을 정처없이 쫓아가면서, 서글프고 찬란한 ‘망각의 본질’을 찾아 나의 언어와 기억을 끌어안는 특별한 경험이 불러일으킨 생각이다.


‘네이처 오브 포겟팅’은 우란문화재단과 함께한 2019년 초청 공연을 통해 처음 한국에 소개되었으며 2022년 연극열전이 한국 라이선스 초연을 선보인 이후 지난해 12월 재연으로 다시 찾아온 작품이다. 초연 당시 쏟아지는 호평 속에서 피지컬 시어터(신체극)의 가능성을 엿본 데 이어, 이번 재연에서는 2개월 장기공연으로 대중에게 한 발짝 더 다가서는 중이다.


2022년에 올려진 라이선스 초연 당시와 달라진 점은 오리지널 프로덕션인 시어터 리(Theatre Re)의 연출 및 안무가 기욤 피지(Guillaume Pigé)를 제외한 모든 프로덕션이 한국인이라는 점이다. 또한 초연 당시 원 캐스트로 열연했던 김지철, 김주연, 마현진, 강은나와 김치영, 조한샘 연주에 더해 전성우, 전혜주, 곽다인, 송나영과 이우림 연주자가 뉴 캐스트로 합류한 것도 눈에 띈다.


시놉시스는 간단하다. 55세의 나이에 조기치매로 기억을 잃어가는 주인공 톰(김지철·전성우)이 자신의 생일날, 교복 재킷과 넥타이를 매개로 뒤엉킨 머릿속 기억들을 쫓는 두서 없는 여정이 ‘네이처 오브 포겟팅’의 뼈대다. 그러나 ‘네이처 오브 포겟팅’이 선사하는 70분의 시간은 결코 간단하지 않다. 


피아노와 바이올린, 퍼커션과 루프스테이션으로 구성된 단 두 명의 라이브 밴드가 극장 안을 음악으로 가득 채우고, 잘 안 들려도 이해하는데 크게 무리 없는 짤막한 대사들 사이로 쉼 없이 이어지는 배우들의 몸짓이 씨실과 날실처럼 정교하게 엮여나간다. 음성 언어가 최소화된 자리를 채우는 음악의 역할은 생각 이상으로 강력한데, 퍼커션 소리에 맞춰-관객들의 심장 박동을 맞추는 거대한 공감 기계처럼-둥둥거리는 아트원 씨어터 2관의 불편한 의자마저 ‘네이처 오브 포겟팅’의 구성 요소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연극열전 제공


관람한 회차에서 특히 인상적이었던 것은 톰 역할을 맡은 김지철의 섬세한 표정연기였다. 김지철은 눈썹을 미세하게 꿈틀대는 움직임 하나까지 정교하게 컨트롤하며 10대부터 20대, 30대, 그리고 55세의 얼굴을 자유롭게 오간다. 의자에 앉아 무기력하게 딸 소피아의 설명을 듣고 있던 55세의 톰이 교복 넥타이를 두르고 무대로 뛰쳐올라가는 순간 활기 넘치는 10대 소년으로 변하는 시간의 마법을 그의 얼굴을 통해 경험할 수 있다.


주인공인 톰뿐만 아니라, 극에 출연하는 배우 모두 온몸을 던져 70분 동안 황홀한 시간을 선사한다. 때로는 격렬하고 때로는 절묘하게, 그야말로 쉴 새 없이 쏟아붓는 춤과 다이나믹한 몸짓에는 배우들의 수고와 열정이 고스란히 묻어있다. 조금 더 오래, 하염없이 톰의 기억을 들여다보고 싶다고 생각하면서도 무대에 흩어지는 땀방울과 의상 아래 언뜻 드러나는 테이핑을 보며 욕심을 갈무리하게 된다.


서로 주고 받는 긴 대사나 노래 없이 70분의 시간 동안, 음성 언어 대신 몸짓 언어를 통해 풀어나가는 이야기 속에서 과연 우리는 마지막까지 내 안에 남아 나를 지탱해줄 ‘무언가’를 찾아낼 수 있을까. 피지컬 시어터 ‘네이처 오브 포겟팅’은 오는 28일까지 서울 종로구 아트원시어터 2관에서 상연된다. 


[이런 분들에게 추천합니다]

★★★ 삶의 슬픔과 아름다움을 사랑하는 모든 분들
★★★ 몸 잘 쓰는 배우들을 보고만 있어도 행복해지는 분들
★★ ‘연극열전’ 극이라면 믿고 보는 분들
★ 영화 볼 때도 아이맥스보다 4DX를 선호하는 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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