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

어느 날, 영화가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by 미정다움

별다를 것 없는 휴일이었다. 먹고 자고를 반복한 하루 반의 시간은 나에게 지독한 두통만을 선물했다.

이미 몸은 회복되었음에도 끝없이 잠이 쏟아졌다.

너무 많은 잠은 사람을 망친다는 것을 알면서도, 내 안의 무언가는 멈추지 못했다.

나를 일으켜 세운 것은 결국 외부의 일정, 나의 일터였다.

번잡하지 않고 엄숙하지도 않은 휴일의 사무실은 나름의 여유를 주었지만,

그곳에는 예상치 못한 복병, 불편한 그 양반’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게 썩 유쾌하지 않은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온 밤,

나는 영화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를 다시 꼼꼼히 보았다.

이탈리아에서 먹는 즐거움을 통해 자유로워졌던 그녀가,

인도의 아쉬람에서 자신의 어두운 그늘과 정면으로 마주하는 장면.

모든 것을 극복한 줄 알았지만,

여전히 과거의 상처에 발목 잡혀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는 그녀의 모습에 나의 마음이 겹쳐졌다.


영화 속에서 상처 많은 텍사스 아저씨 리처드가 그녀에게 말했다.


“자신을 용서하세요.”


그 한마디가 화면을 뚫고 나와 내 심장에 박혔다.


기억 속에 남아있는 나의 상처들,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들에 대한 용서는 의외로 쉽다.

하지만 깊이 새겨진 나 자신에 대한 증오와 후회는 쉽게 알아채기조차 힘들다.

자기 자신을 용서한다는 것은, 엄청난 화학반응을 거쳐야만 가능한 일이었다.


27살의 내가 떠올랐다.

결혼이라는 제도 속으로 편입될 때 앞으로 닥쳐올 문제들에 대해 너무도 무지했던,

그저 열심히만 하면 될 것이라는 막연한 자신감만 가득했던 어리고 어리석었던 나.

나는 그 시절의 나를 용서하지 못하고 있었다.

다시는 그런 어리석은 결정을 하지 않으리라는 결심은,

나도 모르게 나를 날카롭고 경직된 사람으로 만들고 있었다.

어쩌면 그날 사무실에서 마주친 '그 양반' 앞에서 내가 그토록 불쾌했던 이유도,

나의 이런 경직됨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날 밤, 영화 속 주인공 리즈처럼, 아이같이 울고 나니 조금은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맺힌 감정은 그렇게 터뜨려 주어야만 한다.

그래야 새로운 나를 만날 수 있다.

그때의 내가 했던 선택이 바보 같았다고 비난하는 일을 멈추기로 했다.


과거의 나 역시 그냥 나의 일부이다.

그녀를 용서하지 못하면, 나는 지금의 나로서 제대로 살아갈 수 없다.

언제나 현명한 선택만을 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바보 같아져도 괜찮다.

나는 내 삶을 살아내는 중이니까. 과정 중에는 어떤 실수나 오류에 대해서 관대해도 된다.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긴장을 풀고 살아가면 되는 것이다.


나는 내 삶의 제목을 정하는 것을 그만두기로 했다.

‘무제(無題)’. 규정되지 않는 것. 그것이 오히려 나에게 편안함을 준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생각에 있어서만큼은 자유롭고 유연한 사람이고 싶다.

때때로 그저 지나가는 생각들을 이렇게 글로 붙잡아두면 된다.


나는 또 새로운 경지에 이르렀고, 그것은 교만함이 아니다.

그저 삶을 좀 더 편안하고 여유 있게, 나를 지키며 살기 위한 나만의 방식을 터득한 것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