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봄날

겨울 속에 맛본 따뜻한 봄날

by 미정다움

나에게 일어난 모든 일의 책임은 나에게 있다. 책임을 지는 삶은 당당하다.

내 과거에 발목 잡혀 상처받고 원망하고 억울해하는 삶에서 벗어나는 것,

그것이 진짜 자유라는 것을 나는 이제 안다.


오랜만에 좋은 사람들과 시간을 보내며 나의 상처를 살짝 드러내 보았다.

나는 아픔을 말로 뱉는 순간, 그 고통이 조금이나마 희석된다고 믿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녀들은 냉정하고 시크하고 쿨한 사람들이었다.

나의 기대와 달리, 그녀들은 공감 대신 직설적인 조언을 건넸다.

당황한 나는 방어적인 태도를 취하며 변명했지만, 그 순간 깨달았다.

어쩌면 그동안 누구도 내게 직설적인 조언을 해주지 않았던 것은,

나의 이런 공격적인 태도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고.

그렇지만 가끔은 가까운 사이에서 하는 아무리 애정 어린 조언이라도 내 상처를 후벼 팔 때가 있다.

내가 삶을 대하고 사람을 대하듯이 모두가 그럴 수는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했다.

나는 나의 방식으로 사는 것이고, 나와 성향이 다른 사람들과도 함께 살아가야 하니까.

그들의 날 선 조언에 내가 상처받지만 않으면 된다.

아니, 오히려 내가 놓치고 있던 삶의 다른 태도를 배울 기회로 삼으면 그만이다.

그 말로 위축될 필요도, 나를 자책할 필요도 없다.

그저 ‘아, 그럴 수도 있구나’ 하고 받아들이면 되는 것이다.


그렇게 마음을 다잡게 된 경주 여행에서, 나는 유독 엄마를 많이 생각했다.

문득 한여름의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엄마 살아생전, 대가족이 함께 강원도로 휴가를 가던 길이었다.

엄마는 각종 반찬에 밥솥까지 챙겨 와서는, 경주의 어느 공원 돗자리 위에 푸짐한 한 상을 차려냈다.

그 그늘 아래 옹기종기 모여 앉아 밥을 먹던 기억.

엄마의 음식은 사무치게 그립다. 음식의 힘이 이렇게나 강한 것인지 예전에는 미처 몰랐다.

신기하게도 고기는 쌈 없이 먹고 비빔밥은 즐기지 않던 나의 식성마저,

이제는 엄마의 스타일을 꼭 닮아버렸다.

하지만 엄마가 살아계실 때는 그 모든 것이 귀찮았다. 투정을 부리고 날 선 반응을 보이기 일쑤였다. 시간이 지나고 보니, 다시는 맛볼 수 없는 그 모든 순간이 행복이었는데.

살아생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한 것이 가슴 아프게 사무쳤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엄마에 대한 미안함과 송구스러움에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엄마! 내가 내 상처에만 사로잡혀 내뱉었던 말들, 죄송합니다.

엄마는 당신이 할 수 있는 만큼 나에게 모든 것을 베풀어준 고마운 분입니다.

더 이상 엄마의 그늘이 되지 않을게요. 당당하고 자랑스러운 딸이 될게요.”


그렇게 울고 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더 이상의 원망도, 어두움도, 상처도 없다.

과거의 일로 더 이상 아파하지 않겠다. 오늘 이렇게 찬란한 날이 주어졌으니까.

나의 남은 생에서 내가 반드시 해야 할 일들을 해놓고 가겠다.

나의 소중한 아이들과의 시간을 헛되이 보내지 않겠다. 죄책감으로 나를 괴롭히지 않겠다.

날씨처럼 흐려졌다가 맑아지는 내 감정을 정확히 바라보고 읽어내겠다.


나는 이제 더 이상 나약하지 않다. 나 하나 정도는 단단하게 지켜낼 수 있다.

그 모든 것으로부터 받은 좋은 기운을,

앞으로 맞닥뜨리게 될 난관 속에서 꺼내볼 수 있는 여유를 가질 것이다.

가장 소중한 것은 나 자신이라는 것을 잘 안다.

그렇게 지켜낸 나를 통해, 타인을 향한 진짜 선의가 나올 수 있다고 믿는다.





이 글은 2022년 늦은 겨울 어느 날, 장기교육 중에 만났던 귀한 인연들을

경주에서 다시 만나 여행하고 돌아와서 쓴 기록입니다.

인연이란 참으로 오묘합니다. 서울, 아산, 경주, 구미.. 물리적인 거리가 무색하게,

교육이 끝난 후 4년이라는 시간 동안 제 친언니보다 더 자주 만나는 사이가 되었습니다.

저는 관계란 저를 온전히 보여주는 데서 시작된다고 믿었기에,

처음 만난 언니들에게 저의 가장 깊은 상처였던 이혼 이야기를 구구절절 털어놓았습니다.

지금 돌이켜보면 자칫 무겁고 불편했을 그 이야기들을,

눈치 없다 탓하지 않고 오롯이 받아주며 진심으로 저를 위로해 주었던 고마운 분들입니다.


제가 퇴직 후 동굴 속에 틀어박혀 세상과 담을 쌓았을 때조차,

그분들은 저를 걱정하며, 묵묵히 기다려주었습니다.

저는 늘 함께 웃고 떠들 때보다, 헤어져 홀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그분들의 진짜 깊이와 제게 어떤 의미인지를 깨닫곤 했습니다. 존재의 여운이란 걸 믿거든요.

사람은 결국 사랑을 받아야만 살아갈 수 있다는 단순한 진리를 온몸으로 느끼게 해 준 언니들.


제 인생에 진짜 '봄날'을 선물해 준 그분들께 이 글을 빌려 진심을 전하고 싶습니다.

아직도 제 곁에 남아있어 주셔서,

몇 달 만에 만나도 어제 본 것처럼 편안한 사이로 있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함께 나이 들어가고 서로의 성장을 지켜볼 수 있기에, 우리의 노년이 벌써부터 기대됩니다.

우리, 부디 건강하게 오래오래 함께 걸어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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