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살, 주특기는 추억팔이입니다
얼마 전 동생이 대학 졸업을 했다. 집안의 경사인지라 온 친척이 출동할 뻔했지만, 오미크론 때문에 우리 가족끼리만 모였다. 옆 학교를 다녔기 때문에 오랜만에 모교를 방문한 듯했다. 캠퍼스란 장소는 언제나 낭만적이다. 그렇기에 추억하기에 최적의 공간이고.
지금까지 5번 졸업을 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첫 번째 졸업식이다. 여덟 살이 되는 해, 그러니까 유치원 졸업식 말이다. 졸업이라는 개념을 정확히 이해나 했을까? 유치원에 더 이상 다니지 않고 학교에 다닌다는 정도로 생각했을까. 모르겠다. 선생님에게 마지막 편지를 쓰는 시간이 있었다. 굉장히 고민했던 것 같다. 마무리 문장이 떠올랐는데 막상 쓰려고 하니 떠오르지 않아 답답했던 감정이 아직도 선명하다. 애쓰다가 결국에는 비슷한 느낌만 냈다. "저는 떠나지만 선생님 얼굴은 잊지 않을게요." 졸업식 날 내 편지가 게시판에 걸려 있었는데, 선생님이 칭찬을 하자 뿌듯했던지 아빠가 사진을 찍어놓았다.
가장 즐거웠던 것은 고등학교 졸업 때였다. 나와 친한 친구 모두 원하는 대학에 붙었고 무서울 게 없었던 갓 20살이었다. (지금 보면 촌스럽기 짝이 없게) 진하게 화장을 하고 쫙 줄인 치마를 입고 갔다. 반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친구들과 사진을 찍고 서로의 졸업을 축하했다. 교무실에 내려가 정든 선생님들과도 인사를 나누었다. 재수하느라 몇몇 얼굴이 보이지 않은 애들도 있었지만, 아무렴 그게 뭔 상관이었겠는가. 나는 그저 새로운 시작에 설렜던 신입생 혹은 고등학교 4학년 철부지였다.
그때까지 졸업은 곧 진학이었다. 그것은 게임에서 레벨 업하는 것과 비슷했다. 하나하나씩 도장을 깰 때마다 일종의 희열이나 자기만족이 있었다. 언제나 더 밝은 미래가 있을 거라 믿었다. “선생님 얼굴은 잊지 않겠다”는 고별사는 거짓말이었다. 대개 새로운 생활에 적응하느라 이전의 관계나 생활에 대해 특별히 신경 쓰지 않았다. 사람들은 서운해했고 이전의 사건들은 의미를 잃어갔지만, 그런 것보다는 현재의 내 생활과 펼쳐질 앞날만이 중요하게 느껴졌다.
대학 졸업은 처음 맛보는 당황스러움이었다. 다음 학교로 차근차근 스테이지를 옮겨가는 수준이 아니었다. 게임 '배틀 그라운드' 시작 장면처럼 완전히 다른 게임판에 떨어진 듯했다. 하늘에서 떨어진 그곳은 지상이자 현실, 그러니까 어른들이 득실득실한 전쟁터였다. 뜻이 맞는 친구들과 멀어진 곳에서 순수도 열정도 없는 어른들과 함께 지내는 것에 피로해졌다. “나는 이미 글렀다만 너는 그러지 말아라”는 선배의 한탄, “말한다고 바뀌겠니? 네가 그냥 참아라”는 공동체의 답답한 충고, “이 정도 수준의 남자를 만나서 편하게 사는 게 최고야" 등의 위선적 발언들은 내 영혼에 대한 무자비한 총질이었으며 화(火)를 일으키는 폭격이었다.
문득 대학 때 읽었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이 떠올랐다. 다시 책을 집어 들었다.
날이 새면 너 자신에게 말하라. 오늘 나는 주제넘은 사람을, 배은망덕한 사람을, 교만한 사람을, 음흉한 사람을, 시기심 많은 사람을, 붙임성 없는 사람을 만나게 되겠지라고.
-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명상록』(p30)
못 배운 사람이 못 배운 사람처럼 행동한다면, 그게 무슨 불행이며 놀랄 일인가? 이런 사람이 이런 잘못을 저지를 수 있다고 예상하지 못한 데 대하여 너 자신을 나무라야 하는 것이 아닌지 살펴보라. 너는 네 이성에게서 이런 사람은 이런 잘못을 저지를 개연성이 있다는 것을 추리할 만한 능력을 부여받았는데도, 그것을 잊고 그가 잘못을 저질렀다고 놀라니 말이다.
-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명상록』(p.159)
너무나 쉽게 이전의 관계와 의미를 지워냈고 한 계단씩 오르는 것에만 도취되었다. 그래서 계단 주변에 무엇이 있는지 몰랐다. 그런데 떨어져 직접 목격하곤 놀랐던 것이다. 원래 세상은 이런 곳인데, 무지한 건 온실 속 화초 같은 나뿐이었구나! 어쩔 줄 몰라하는 내게 아우렐리우스가 반문한다. 너... 몰랐냐? "비극 배우나 창녀처럼 행동하지 마라."
이제는 특별히 놀라거나 화내지 않으려 한다. 나도 어느새 그들과 같아져 순수도 열정도 잃어가는 것일까? 글쎄, 아직은 균형감을 찾는 중이라고 해두자. 누구에게 따뜻한 조언할 수준은 아닌듯하니 아우렐리우스의 입을 빌려 졸업하는 동생에게 하고싶은 말을 전한다. 혹은 내가 나에게.
네 몫으로 주어진 사물들에 적응하고, 운명이 네게 정해준 사람들을 사랑하되 진심으로 사랑하라.
-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명상록』(p.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