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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ubia Jan 25. 2017

페미니즘과 여성영화

<아가씨>,<캐롤>,<연애담>/<비밀은 없다>,<미씽:사라진 여자>


2016년 충무로 시장의 두드러진 특징 하나를 꼽으라면 현실 정치판을 그대로 옮긴 남성 중심의 리얼리티 영화들의 강세 속에서도 여성 영화인들을  중심으로 한 여성 주연 영화들의 눈에 띄는 약진세에 있다.



먼저 이런 여성 영화들의 약진 현상을 설명하기 전에 '록산 게이'의 <나쁜 페미니스트>란 책에 대한 이야기를 잠깐 해볼까 한다.

우리 사회에서 페미니스트 하면 여전히 특정 대상을 넘어 공공의 적이 되곤 한다.

그래서 우리 사회에 만연해있는 이런 페미니스트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나 인식을 타파하는 일은 단순히 호모포비아 같은 부류의 특정 남성들의 범위에만 국한시켜서는 안된다. 남성들은 차치하고서라도 이 문제의 주체인 여성들 스스로도 이런 공공연한 타깃이 되는 것이 두려워 여성 문제에 대해 목소리를 내고 싶어도 주저하는 게 현실이다.


이러한 양상은 우리 사회에서 기득권이나 어떤 특정한 상황이나 문화, 정치권에서 특혜를 누리고 있는 자들의 거세불안과도 관련이 깊다. 자신이 누리고 있는 것들을 거세당할 수도 있다는 잠재의식이 페미니즘이나 페미니스트들을 향한 무의식적인 칼날과 공격본능으로 표현된다.

그러나 페미니즘은 단순히 여성문제만을 다루지 않는다. 여성문제 나아가 임신과 낙태, 출산과 같은 여성의 신체에 대한 자율권과 생존 문제, 성 소수자 문제, 정치사회 전반에 걸친 약자의 권익 문제, 심지어 묻지마 폭행이나 살인사건 같은 여성을 대상으로 한 끔찍한 범죄 등 포괄적인 정치 사회  문제들과 맞닿아있다.

그리고 여성들 스스로도 사회에서 무조건적인 약자에 자리에 있다는 피해의식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우리나라의 경우 여성으로 태어난 덕분에? 군면제 혜택이 주어지지 않는가. 이또한 여성이 남성들의 희생 위에서 누리는 특혜의 일종이다.

그래서 페미니즘이나 페미니스트는 단순히 여성만을 알레고리로 엮는 문제가 아니라는 인식이 사회 전체적으로 폭넓게 수렴되어야 한다.

여성이 남성을, 남성이 여성을 이해하고 보다 많은 이들의 공공의 선을 위해 보다 긍정적인 방향으로 나아가고 변화하기 위해서는 서로가 지닌 이런 특혜들을 인정하는 일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이는 역으로 말하자면, 상대로부터 자신이 가진 특혜에 대해 어떤 공격과 비난을 받더라도 그것을 기꺼이 인정하고 그것에 대해 긍정적으로 토론할 수 있는 문화가 형성되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록산 게이의 나쁜 페미니스트에는 저자 자신이 이런 사회적 약자로서, 여성으로서, 흑인으로서, 나아가 미국이란 사회에서 아이티가 뿌리인 외국인 이민자로서 부당하게 겪어야만 했던 자신의 경험들이 녹아있다. 동시에 그녀는 흑인 여성이지만 비교적 안정적이고 가정적인 집안에서 고등교육을 받으며 대학에서도 박사학위를 받고 교수로서도 저자로서도 어느 정도 자리매김을 한, 그래서 전적으로 사회적 약자라고만은 할 수 없는, 그녀가 누렸던 여러 특혜들에 대해서도 기꺼이 인정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래서 쿠엔틴 타란티노의 <장고:분노의 추적자>나 <헬프>,<노예 12년> 같은 영화들 속 흑인 노예들의 삶과는 전적으로 다른 삶을 살아온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이 사회란 여전히 불합리하고 부조리한 면들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그녀는 흑인이며 여성이며 이민자라는 측면에서 여전히 약자이기도 하다. 그녀 역시 미국 사회에서 '니거(Nigger:흔히 깜둥이라 부르는 흑인들에 대한 비속어)'라는 카테고리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을 것이다.


저자는 그런 부합리와 부조리 앞에서 나쁜, 즉  충분치는 않으나 어떤 식으로든 제 목소리를 내는 나쁜 페미니스트가 되겠다고 자처한다.

이 책이 굉장히 흥미로운 것은 페미니즘의 대중화와 의식의 변화를 촉구하는 저자의 직설적이고도 유머러스한 경고들을 읽는 재미와 함께 놀라울 정도의 방대한 문화적 데이터들이 첨부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거기에는 단순히 작가 자신처럼 소설가나 비평가의 책이나 칼럼, 비평 뿐만이 아니라 대중문화의 소통창구 역할을 하는 텔레비전 리얼리티 쇼 프로그램부터 코미디 프로, 음악 경연 프로, 영화 등 수많은 자료들을 데이터베이스 삼은 그녀의 방대한 사적 경험을 훔쳐보는 일의 놀라움과 간접경험이 포함된다.

그리고 그 속에는 학창시절 집단 성폭행과 같은 저자 자신의 지독히도 나쁜 경험들도 포함되어 있다.


이런 자신의 경험과 텔레비전 혹은 많은 영화들에서 그녀가 여성 패널이나 쇼 오락 프로그램 속에서 여성들이 어떻게 자신을 전시하는지 분석한 시선들은 굉장히 흥미롭다. 그녀들은 자신의 정체성 대신 기꺼이 착하거나 멍청하거나 순진하거나 아니면 그 반대의 경우를 연기한다. tv 대중문화 속에서 그녀들은 기꺼이 그 프로그램이 원하는 방식의 사람이 되기로 작정하거나 그런 척 연기한다.

여성은 여성으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많은 경우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여성성을 수행하거나 여성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는 사회적 관습에 부응하는 행동을 보여야만 한다고 지적한다. 그래서 그렇게 행동하는 여성은 자신의 그런 모습이 대중에게 어떻게 비춰지고 소비될지에 대해서도 이미 어느 정도 다 예측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녀들의 정체성이 있어야할 자리에 그녀들의 연기(여성으로서 이렇게 보여야 한다는)가 있다는 것은 우리 사회는 여전히 조금만 여성이 이런 관습에서 벗어난 행위를 할 때 "어디 여자가?"하는 식의 폭력을 행사한다. 이는 뿌리 깊게 박혀있는 여성에 대한  사회문화적 관습 때문이다.

똑같은 행위를 하더라도 " 어디 남자가?" 하는 말을 들어본 적은 없다.

이 한 가지 사실만으로도 우리 사회는 분명 여성들에게 더 많은 것들을 요구하고 더 많은 족쇄를 채우고 더 많은 관습이라는 감옥에 여성들을 가두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록산 게이는 그렇게 '~인 척' 연기하는 것이 우리 사회에서 여성이 존재하고, 존재할 수 있는 방식임을 지적한다. 이것은 비단 텔레비전 속 이야기만이 아니다.

많은 영화들에서도 여성은 남성의 부속품인 척  기능하다 어느 순간 버려진다. 마치 여배우들은 판사나 검사, 대통령, 국회의원 같은 전문직 종사자나 정치인 혹은 나쁜 악역이나 그 어떤 장르를 불문하고 영화 속 주인공이 될 수 없다는 듯이 말이다.

2016년 충무로에 분 변화가 반가운 이유도 이 때문이다. 어찌 보면 지극히 당연한 일임에도 여기까지 오는데도 우리 사회는 많은 시간이 걸렸다.

과학이나 사회, 경제적 발전은 빠른 속도로 사회를 변화시켰지만 우리 사회에서 여성이 남성들과 유사한 권리를 누리기까지의 과정은 실로 지난하고 더딘 편이다.


영화 <아가씨>의 등장이 유난히 반갑고도 의미 있는 이유는 단순히 충무로 시장에서 남성 원톱이나 브로맨스 영화도 아닌, 여여 투톱의 영화가 나와주었다는 그 일차원적인 변화 때문만은 아니다.

만약 영화 아가씨가 남성이 아닌 여성 감독의 손에 의해 빚어졌다면 사실 이 영화는 지금처럼 많은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키지 못했을 수도 있다. 그것은 우리 사회의 어느 정도 지배층, 권력자라 할만한 남성 감독 그것도 해외에서 꽤나 영향력 있는 감독으로 손꼽히는 박찬욱 감독에 의해 빚어졌다는 사실이다. 어느 정도의 기득권을 지닌 거장이라 불리는 남성 감독이 여성의 이야기를, 그것도 파격이라 할만한 남성체제에 대한 도전과 항거를 통한 여성들 스스로 자유와 사랑을 찾아가는(그렇게 남성체제에 대한 전복과도 같은) 작품을 내놓았다는데 그 의미가 있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변화요, 혁명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퀴어영화로서 <아가씨:박찬욱 감독/ 김민희, 김태리 주연> 이후로 <연애담: 이소현 감독/ 류선영, >이, 장르영화로서는 <비밀은 없다: 이경미 감독/ 손예진 주연> 이후로 <미씽: 사라진 여자_이언희 감독/ 엄지원, 공효진 주연>, 독립영화로는 <우리들: 윤가은 감독>로 이어진 이러한 여성 주연 혹은 여성 감독이 메가폰을 잡고 여배우가 극을 이끌어가는 중심인물로 등장했다는 점은 우리 사회에 부는 작은 변화의 바람이 충무로 시장에까지 미쳤다는 방증일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강남 묻지마 살인사건'과 같은 시류를 타고 작지만 의미 있는 시도나 변화들을 만들어내고 있다. 그럼에도 아직 갈 길이 멀지만 2016년에 이어 2017년에는 또 어떤 의미 있는 여성 영화들이 나와줄지 기대가 된다.



페미니즘을 단지 돈 꽤나 있는 할 일 없는 여자들이 기득권 남자들을 끌어내리기 위해 하는 험담쯤으로 여겨서는 안된다.

남성들도 얼마든지 페미니스트가 될 수 있다. 누군가가 마땅히 누려야함에도 동등하게 누리지 못하는 것들에 대해 균형을 찾아가려는 시도는 당신이 이미 가지고 있는 권리나 혜택을 뺏는 행위가 아니다. 당신이 이미 가진 것을 나누어 가지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갖지 못한 것을 가질 수 있도록 응원하고 격려하는 일이다.

그러니 남성도, 여성도 페미니스트가 되길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보다 많은 이들을 위한 선을 실천하려는 의미 있는 시도를 남성과 여성이라는 편 가르기 구도로 이분화시킬 필요가 있겠는가.

된장남, 김치남이라는 말이 없듯 된장녀, 김치녀, 김여사(여성 드라이버들을 비하해서 부르는 말)라는 저속하고도 편협한 시선으로 자신과 다른 성을 바라보는 사고부터 당장 던져버려야할 것이다. 우리 사회는 잘못된 소비습관, 부주의로 인한 교통사고 그 자체가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여성이라는 젠더가 문제가 되는 사회이다.

이러한 왜곡된 시선, 여성이라는 성을 바라보는 관점의 전환이 이루어지지 않는 한 우리 사회에서 여성은 여전히 록산 게이가 말한 '그린 걸'(일종의 착한 여자 콤플렉스, 셰익스피어의 햄릿 속에 나오는 말)의 강박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여성은 지금까지 무엇보다 이 사회에서 살아가기 위해서 착하고 참한 여자가 되어야 했다.

이러한 관습의 틀을 무너뜨리는 일이야말로 우리 사회가 조금이라도 더 발전된 방향으로 나아가는 길이다. '같이 죽자'가 아니라 '같이 살자'가 우리 사회의 슬로건이 되어야 한다.


개별 영화들에 대한 칼럼은 아래 링크를 통해 확인하시기 바란다.



미씽:사라진 여자

비밀은 없다

연애담

캐롤

아가씨

우리들

내부자들& 실종:사라진 아내를 통해 본 여성 캐릭터들 활용의 문제점

내부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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