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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ubia Jan 27. 2017

여교사

자존감이 무너진 사회


계약사회, 시한부 인생들


영화 <여교사>의 파국은 단순히 세 인물간의 욕망의 충돌 때문이 아니다. 그러한 욕망의 충돌을 부추긴 근본원인은 따로 있다. 자존심과 자존감이 무너진 사회의 비극이 바로 영화 여교사를 관통한다.


이 영화의 소재는 의외로 많은 논쟁과 담론을 형성할만한 훌륭한 소재이다. 그 외피는 분명 교사와 제자 사이의 부도덕한 관계로 인한 파국으로 보이지만, 그러한 관계의 기저에는 복잡한 사회 구조적인 문제가 개입되어 있다.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계약 사회에 살고 있다. 누구도 정년을 보장받을 수 없는 불안정한 사회에서 살고 있는 개인은 그러한 불안정한 미래를 조금이라도 구원받을 수 있는 계층으로의 이동을 꿈꾸기 마련이다. 옛날과 같은 절대적인 피지배와 지배계층을 구분짓는 기준은 사라졌지만, 우리는 여전히 권력과 계급의 올가미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마르크스는 자본론에서 이러한 자본에 따른 계급의 파생이야말로 계층간의 투쟁을 불러올 수밖에 없다 역설한 바 있다. 현대사회는 여전히 계급사회이며 투쟁의 사회이다.

일자리 창출이라는 정치적 포퓰리즘의 희생양으로 수많은 인턴이라는 이름표를 단 계약 사원들이 사회 곳곳에서 넘쳐난다.


영화 여교사 속 효주란 인물은 현대사회의 계급의 속성을 적나라하게 온몸으로 체감케하는 인물이다.

조선시대처럼 눈에 보이는 폭력으로 작용하진 않지만, 더 비열한 방법으로 계급이라는  피라미드의 하층에 자리한 흙수저들의 목줄을 조여서 끌어당긴다.



당신이라고 뭐가 달라?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는 개새끼 한 마리가 필요했던 거잖아


재하가 효주에게 한 말은 실상 효주가 사회에서 수없이 직면해야했던 문제일 것이다.

하라면 하고, 나가라면 나가고, 출산휴가를 간 정규직 선생을 대신해 담임교사를 맡으라면 맡고.

그녀에겐 자신의 의지대로 무언가를 행할 수 있는 권리란 것이 행사될 수 없다.

게다 10년을 젊은 청춘 다 바쳤던 동거남은 경제적으로도, 인간적으로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 효주에게 또다른 식의 폭력을 행사한다.


"니가 이렇게 빨리 미친 x이 될 줄이야."


그녀의 입장을 이해하고자 하는 사람도, 이해해주는 사람도 없는 세계에서 효주가 자신을 지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세상을 향해 가시를 세우는 일 뿐이다.

처음 이사장 딸이라며 효주의 학교에 불쑥 자신과 같은 화학교사로 부임해온 혜영에게 효주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가시 돋힌 말들을 내뱉는 이유도 이런 연유 때문이다. 어차피 세상은 자신 편이 아니며, 내 것인 것이 하나도 없다는 걸 뼈아프게 인지한 이에게 남는 건 독기 뿐 아니겠나.



자존감이 무너진 사회에서 개인에게 남는 건...


혜영과 재하의 관계를 목격한 효주의 태도는 이제 이 더러운 세상에서 이길 수 있을 거 같은 자신의 패를 쥔 자의 착각 같은 것이다.

혜영의 약점을 알고 그녀를 코너로 몰아가는 효주의 행동은 한 번도 이겨본 적이 없는 세상에서  이기는 패를 쥔 자의 그것처럼 보이지만, 실상 진실은 오히려 그 반대이다.

권력이란 그렇게 쉽게 무너지지 않는 법이다.

결국 세 사람 관계에서 제일 약자는 누구였던가? 효주이다. 여차하면, 제자와 부정한 관계를 맺었다는 도덕적 비난과 계약직 교사 해고라는 이중고를 떠안아야만 한다. 그것이 바로 효주가 혜영 앞에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던 이유이다.

재하의 결핍을 보살피며 선생으로서 제자에게 가질 수 있는 사심의 가장 우아한 방법이 무엇인지를 혜영에게 가르치고 싶었던 효주는 결과적으로 재하와 혜영의 게임에 오히려 놀아난다.


"걔(혜영)는 널 사랑하는 게 아니야?"


제자에게 항변해보지만,


"당신은 내게 선생도, 여자도 아닌 악마 그 자체"비수가 되돌아올 뿐이다.


어디 그뿐인가.

재하를 정말 사랑한 거냐고? 확인사살하는 혜영의 한 마디는 효주가 마지막으로 부여잡고 있던 여자로서 남은 그 마지막 자존심 하나마저도 철저히 무너뜨린다.

흙수저와 정식 선생도 아닌 게 휴대폰을 뺏었다고 입에 담지 못할 말을 내뱉던, 다른 많은 제자들 앞에서 철저히 무너졌던 계약직 교사라는 효주의 무너진 자존심은 어린 남학생 제자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자존감의 말살로 이어진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란 영화를 보면 다니엘이 공무원에게 이런 말을 한다.


"사람이 자존심을 잃으면 다 잃는 거예요."


그러니 이 영화 여교사의 파국은 예정된 수순이다.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마지막 인간적 자존감 하나로 버텨온 인물이 그 하나 남은 자존감마저도 무릎 꿇어야 했을 때 그녀에게 남는 건 복수밖에 없다.


영화 여교사는 불편한 소재의 주춧돌 위에 더 불편한 현대 계급사회의 민낯의 축대를 쌓아올린다.

돈이 권력이 되고, 부모의 백과 돈이 인생의 동아줄이 되는 사회에서 고달픈 흙수저들이 힘들게 쌓아올린 인생의 가치들은 힘없이 무너질 수밖에 없다.

"돈도 능력이다. 니 부모들을 원망해라"라던 정유라의 당돌한 발언에서 권력의 피라미드, 그 꼭대기에 계신 분들의 헐벗은 얼굴을 본다.

있는 자에겐 돈이 권력이요 백그라운드가 무기겠지만, 없는 자들에게 유일한 위안은 자존심 하나 뿐이다. 누가 그리고 무엇이 효주의 자존감을 말살시켰는가?

바로 그것이 영화 여교사의 질문이 맞닿아 있는 부분이다.




보다 심도 있는 여교사 관련 리뷰는 아래 제 블로그 글에서 따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영화<여교사> 욕망, 거짓말, 파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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