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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럴수있지 Jan 25. 2024

따님, 공주방을 준비했어요

너의 작은 세계

이사를 하는 과정은 쉽지 않다.

거액의 거래에서 오는 압박감과 날짜에 맞춰 그 많은 살림살이를 옮기고 설치하고 정리하는 일까지. 

몸살이 안 나면 다행이다.

이사를 하면서 유일하게 즐기는 과정이 하나 있는데, 그건 바로 인테리어다. 

그런데 그 인테리어에도 각자의 취향이 있는 것이 아닌가. 우리 집 같은 경우에는 모던한 것을 좋아하는 아빠와 우드와 클래식을 좋아하는 엄마, 그리고 공주들 중에도 분홍색을 담당하는 공주만을 좋아하는 5살 딸이 구성원이니 취향이 참 다양하다.


가정의 평화를 위해 우리는 각자의 공간에 최대한 취향을 반영해 주기로 하는 방법을 생각해 냈다. 방 하나는 재택근무가 종종 있는 남편의 서재로 사용하기로 했다. 주방은 전업주부인 내가 주로 생활하는 공간이니까 나의 공간이다. 안방은 남편과 나의 공동 취향을 반영하고 거실은 모두의 취향을 반영해야 한다. (취향의 비율에서 나의 비율이 월등하기는 하다) 

그리고 딸의 공간인 딸의 방이다.


딸아이의 방엔 골드 손잡이의 우아한 옷장이 원피스를 그득 품은 채 한자리 차지하고 있고, 

벽에는 따뜻하게 그려진 동물그림의 스티커를 아이가 무자비하게 붙여놓았다.

커튼은 별모양 펀칭이 되어 있는 암막커튼과 샤랄라 한 하얀 망사 커튼의 콜라보다. 햇빛이 잘 들어오는 낮이면 아이의 방에 별이 둥둥 뜬다.

아직 침대프레임은 사지 않았지만 공주 포인트는 넣어줘야겠어서 커다란 분홍색의 왕관 쿠션도 자리 잡고 있고 그 앞에는 좋아하는 책들이 알록달록 꽂혀있는 회전책장도 있다.


아이가 가장 좋아하는 건 엄마눈엔 너무 어설퍼서 미안하기까지 한 화장대다.

이사가 막 끝난 이 집에 아이가 들어왔을 때, 

처음 한말이 “로미 화장대는 어디 있어요???”였다.

아..??  화장대라니..??

거울 보며 뽐내는 걸 좋아하는 건 알았지만 이건 너무 본격적인데.

그래도 이사 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엄마는 최대한 마음에 들게 꾸며주고픈 마음에 인터넷을 뒤진다. 아이가 1년이면 질릴 테지만 지금은 너무 좋아할 만한 디자인의 작은 화장대가 20만 원이 넘는다.

아이가 너무 좋아하겠다. 아니야 1년이면 작아서 못써

그래도 지금 너무 좋아서 방방 뛰겠는데? 아니야 1년 쓰는데 20만 원 넘는데 그 돈이면 다른 걸 사주자


결국 가성비가 이겼다. 남는 금액으로 수영장이라도 한번 더 놀러 가서 재미있게 놀다 오자라는 생각이었다.

벽에 동그란 거울을 하나 붙여주고 책상과 의자를 두고 책상 위에는 액세서리를 정리해 주었다. 물론 의자는 핫핑크를 포기할 수 없지.

어린이집을 다녀온 아이에게 남편과 온갖 호들갑을 떨며 공개했을 때, 아이는 기뻐 어쩔 줄 몰라하며 핑크 의자에 살포시 앉아 공주처럼 목례를 했다.


이사 후 친구들이나 부모님과 영상통화를 하면 아이는 핸드폰을 뺏어 들고 자기 방으로 달려 들어간다. 카메라를 제대로 못 맞춰 상대방은 천장만 볼 지언정, 본인은 자기 방 자랑에 열심이다. 여긴 공주방이니까 공주 표정은 빠지지 않는다.  

그런 아이를 보면 저렇게까지 좋아할까 싶어서 뿌듯하고 이게 행복이지 싶다.

그리고 마음 한쪽이 저릿한 이유는 

그렇게 자기 방을 좋아하던 어린 시절의 내가 보이기 때문일까.

그걸 보며 흐뭇해하던 나의 부모가 보이고 그들의 마음이 보여서일까.


내 어린 시절 방엔 노란색 바탕의 블라인드가 있었고 석양이 잘 들어왔다. 

5시쯤 되면 온갖 노랗게 물드는 그 방에 혼자 앉아 책도 읽고 음악도 들었다. 그러면 내 마음은 한껏 벅차오름을 느끼는 것이었다. 30년이 훌쩍 지난 지금도 어릴 적 나의 세계는 따뜻한 벅차오름으로 기억되고 있다.


아이에게 본인의 어린 시절 방은 어떻게 기억될까

다신 오질 않을 아이의 5살의 작은 세계는 어떤 느낌일까

30년쯤 지나면 아이에게 그 느낌을 들을 수 있을까

어떤 이미지로 기억될지는 모르겠지만

방에서 꿈꾸게 될 반짝이는 순간들이

아이가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 한 번씩 어루만져줄 수 있는 추억이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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