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간 때와 마주하며
장롱 문을 열다가
서랍 깊숙한 곳에 잠들어 있는
한 무더기의 시간을 발견한다.
어느 해 방문턱까지 들이닥친 물난리에
겨우 건진 사진 몇 장과 일기장이
오랜 잠에서 깨어 기지개를 켠다.
앨범 속지는 힘을 소진한 지 오래지만
그날의 향기는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수줍다.
계단에 열 지어 앉은 녀석들의 알록달록한 운동화 사이로
내 검정 고무신 한 켤레가.
울고불고 떼써도 빈손이었던 아침 등굣길이
서러움 꾹꾹 눌러써 내려간 글자에 흥건하게 번져있다.
과거의 내가 미래의 나에게 남긴 유물.
입으로 불고 살살 손으로 붓질하여
내 삶의 거름,
달콤한 가난을 발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