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가 머리가 확 좋은 건 아니었잖니.
얼마전 최모 선생님과 통화 중 나온 이야기다. '그렇지, 내가 머리가 확 좋은 사람은 아니지' 하며 오랜만에 메타인지를 하게 됐다. 내 머리는 1을 배우면 10을 깨우치는 그런 특별함은 없다. 그저 남들만큼 모나지 않은 평범한 수준이다. 선생님은 내가 초등학교 5학년때부터 중학교 3학년 때까지 과외를 해주셨기 때문에 나의 지능수준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계시는 분이다.
당시 난 선생님께 2대1로 과외를 받았고, 나와 과외를 받던 또 다른 친구 한 명은 머리가 좋았다. 내 기억에도 그 친구는 하나를 배우면 10까진 아니어도 5까지는 응용이 가능했다. 반면 난 딱 배운데까지만 생각할 수 있었던 것 아이였던 것 같고.
그런데 난 그 친구를 이겨야 직성이 풀리는 아이였다. 잘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선생님의 설명에 의하면 그렇다고 한다. 선생님은 내가 12살부터 34살이 된 지금까지 지난 22년간 내 인생을 곁에서 지켜보며 '샘이 많은 아이가 꾸준히 노력을 하면 성취할 수 있구나'를 느꼈다고 하셨다.
그런가. 난 샘이 많았고, 그래서 노력을 했던가.
내가 어린 시절부터 자신있었던 건 '오래달리기'였다.
살면서 단 한 번도 운동회의 꽃인 계주 달리기 선수가 되어본 적이 없다. 난 빨리 달리는 데 소질이 없으니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이 당연한 일이다. 빨리 달리는 일은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 선천적 재능이고, 예체능 분야에서 재능이란 건 노력만으로 따라잡을 수 있는 범주가 아니다.
그런데 오래달리기는 달랐다. 내가 '해보겠다'라는 강한 마음만 먹으면 그저 달리면 되는 일이었다. 중간에 포기하지 않고, 할 수 있는한 발을 앞으로 내딛기만 하면 끝까지 달릴 수 있었다. 그건 빨리 달리는 일과 비교해 재능 보단 노력으로 어느 정도 결과를 낼 수 있었다. 체력도 재능이라고 누군가 반문한다면 머리를 긁적일 수밖에 없겠지만서도, 그래도 빨리 달리는 일에 비하면 재능이란 요소가 상대적으로 큰 부분을 차지하지 않는 것 같다. 노력만으로 어느 정도 결과물이 달라질 수 있단 점에서 오래달리기가 훨씬 더 공정한 게임이 아닌가, 난 그렇게 생각한다.
내겐 공부도 달리기와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최대한 객관적으로 내 지능 수준은 아주 특출나지도, 모나지도 않은 보통, 딱 그 정도다. 어릴 적 한글을 일찍 깨우쳐 우리 부모님은 이 아이가 천재가 아닌가, 하며 손뼉을 쳤겠지만 그런 경험은 아이를 키우는 부모라면 누구에게나 한 번씩은 있는 법이다. 여하튼 난 어릴적부터 평균치를 웃도는 아이였다. 학교에서 받아오는 시험 성적 평균은 대개 88점. 아슬아슬하게 90점은 넘지 않아 공부에 특별한 재능이 있다 말할 수 없지만, 어느 정도 대강 공부하면 늘 88점~89점에 머물러서 '공부가 길이 아니다'라고 섣불리 판단할 수 없는 그런 상태.
본격적으로 공부를 시작한 건 중학교 3학년 때부터였다. 드라마가 너무 좋았던 나는 성공한 덕후가 되기 위해 방송국 PD가 되어야겠다고 결심했다. PD들이 쓴 책을 읽어보니 공통적으로 좋은 대학을 나와야 PD가 되기 위한 첫 번째 관문을 통과하는 것 같았다. 목표가 정해지니, 공부할 의지도 불끈 솟아났다. 다행이 내겐 전교권에서 노는 공부 잘 하는 친한 친구가 있었고, 그 친구를 따라 학원도 다니며 열심히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평소보다 노력하니 시험 성적은 평균 90~92점대로 올랐고, 난 스스로에게 일말의 가능성을 발견했다. 고등학생 때 성적은 눈에 띄게 좋아졌다. 고3 때는 전교 7등까지 성적이 올랐다. 노력한 만큼 결과가 나오자, 공부의 재미를 느꼈다. 그 때의 난 '독한' 부분에 있어서는 자신이 있었다.
목표가 있는한 꾸준히 오래달리기만 한다면 적어도 목표지점 비슷한 수준까지는 도달할 수 있다.
하지만 오래 달려야 하는 선수로서의 삶이 마음에 드는 것만은 아니다.
선생님은 노력 덕에 여기까지 왔다고 칭찬해 주셨지만, 나로서는 이따금씩 '왜 이렇게 아등바등 딱 노력한만큼만 결과가 나올까'하고 한탄하게 될 때도 있다. 때때론 남들처럼 운이라는 요소도 작용해서 내 기대 이상의 성취를 맛보고 싶기도 하다. (어쩌면 다른 사람들이 '운' 덕에 좋은 자리에 올라갔다고 말하는 일 조차 나의 오만함인지 모른다. 그게 그들의 노력 덕택인지, 운 덕택인지 난 알 길이 없으니.)
남편에게 고민을 털어놓으면, 그는 대답한다. "노력 만큼이라도 나오는 게 어디야."
그래. 우문현답이다. 노력 만큼 결과물이 나오는 삶은 그야말로 근사한 삶이다. 세상은 변수로 가득하고, 노력은 언제나 공정한 결과를 가져오지 않으니까.
노력한 만큼은 결과가 나오는 나를 믿고, 오늘도 오리처럼 물 밑에서 발차기를 세차게 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