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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ris Seok Jan 14. 2022

친절하고 화사한 할머니가 되고 싶어

야호!


첫째 아들의 3주간의 겨울방학이 끝났다.

미국에선 오미크론 변이 감염자가 하루가 다르게 늘어나 역대 최고 수치를 기록하고 있는데 아들의 개학을 기뻐해도 되나 싶다가도, 얼굴에 피어 오르는 미소를 어찌하면 좋을까.


재택근무를 하는 워킹맘에게 아들의 방학 기간은 지난한 시간이었다. 아들의 사회생활을 위해 '플레이 데이트'를 하자는 학부모들의 제안에 모두 응하는 동시에 풀타임 재택근무를 하는 건 나에게도 다른 학부모에게도 몹쓸 짓인 듯 했다. 코로나 시국의 플레이 데이트는 보통 한 아이의 집에서 이뤄지는데, 아이들이 놀고 있으면 학부모들은 테이블에 앉아 수다를 떤다. 그 때 ‘전 마저 일을 좀…’하며 노트북을 꺼내는 나의 모습은 아무리 생각해도 민폐녀 그 자체다. 다행히도 워킹맘의 난처한 상황을 이해해주고, 내 아들을 플레이 데이트에 불러주는 학부모 친구들에게 그저 고마울 뿐이다.


끝나지 않을 것만 같던 겨울방학이 끝났고, 그 이야기인 즉슨 나는 자유의 몸이 됐다.


어차피 재택근무를 하고있는 와중에 자유의 몸이라는 표현이 모순적인 것 같지만, 내가 원할 때 차를 타고 나가서 커피 한 잔 마실 여유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내겐 큰 자유감을 선사한다.


코로나19 시국에 어디를 가겠느냐만은, 그래도 가고자 하는 의지만 있다면 어디든 갈 곳은 있는 법.

개학 첫 날 아들을 학교에 데려다주고, 나는 '트레이더조' 슈퍼마켓을 향했다.


코로나19 시기에 살면서 깨달은 한 가지는 마켓이 굉장히 즐거운 곳이라는 점이다. 과거에는 마켓에 장보러 가는 일이 마치 미루고 미뤄왔던 숙제를 하는 것처럼 귀찮게 여겨졌다. 그런데 지난해 코로나19 사태 초창기에 모든 장소에 '봉쇄령'이 내려지고 마켓만 외출 허용이 가능해지자, 마켓을 가는 일은 내게 쇼핑을 가는 일이 됐다. 그리고 알았다. 식료품 쇼핑도 엄청나게 흥미롭다는 사실을.


평소 좋아하던 자몽 주스, 자몽 요거트, 유기농 과자, 과일 등을 사서 계산대로 갔다. 계산대에는 백발의 할아버지가 계셨다. 전형적인 백발의 백인 할아버지. 미국 드라마, 영화를 보며 자란 내게 '미국의 할아버지' 하면 자연스럽게 상상됐던 그 모습 그대로인 분이셨다.


할아버지는 화사한 웃음으로 날 반겨주셨다. '오늘 기분이 어때'로 시작한 할아버지와의 대화는 '날씨가 끝내준다' '코로나19 감염자가 늘어나니 조심해야 한다' 등의 내용으로 이어졌다. 특별할 것 없는 대화였지만 대화 도중 할아버지는 계속 미소짓고 계셨다. 그 미소를 통해 내가 할아버지로부터 환대받고 있으며, 귀하게 여겨진다는 느낌 마저 들었다.


모든 슈퍼마켓 직원들이 친절한 것은 아니다. 때때로 슈퍼마켓에서 계산을 하면서도 '인종차별인가' 싶을 만큼 불편했던 감정을 느낀 적도 더러 있었다. 캐시어가 눈을 흘긴다거나, 툭툭 말을 내뱉으면 괜시레 어깨가 움추러들곤 했다. 상대방의 불친절함에 '내가 외국인이라서 그런 걸까'라고 자문하며 순간의 기분에 스크래치가 났다. 이민자의 자격지심일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경우는 살면서 생각보다 잦았다.  


하지만 트레이더조에서 만난 할아버지의 환한 웃음과 상냥한 말씨 덕에 그날 아침의 기분은 아침 햇살처럼 따스했다. 할아버지는 참 아름답게 노년을 맞이하시고 계시구나. 할아버지를 보며, 나도 저런 노인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기분 좋은 미소는 전염된다. 따뜻한 말 한 마디를 건네며 누군가를 기쁘게 할 수 있는 하루를 산다면, 그건 얼마나 가치있는 삶일까.


그날 인생의 목표가 하나 더 생겼다.

친절하고 화사한 할머니가 되는 것.

그렇게 나이든다면 더 바랄게 없을 것만 같은 아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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