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이 꽃 피지도 못하고 져버려서 안타까워요.
서울대를 나온 70대 한인 어르신분들을 인터뷰 하다 말미에 들었던 말. 그 말을 듣자 심장이 벌렁거렸다. 정곡을 찔린 기분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격하게 공감했기 때문일까.
딸을 가진 그분들은 딸들이 애를 낳고 자기 커리어를 꽃 피우지 못하고 집에서 능력을 썩히고 있다고 안타까워하셨다. 그분들의 딸은 부모로부터 공부 잘하는 유전자를 물려받아서인지 다들 공부를 잘했다. 어려서부터 남다른 두뇌를 뽐냈던 딸들은 미국에서도 내로라하는 대학에 척척 들어갔다고 한다. 대학 졸업 후에도 저마다의 커리어를 쭉쭉 쌓아 올리던 딸들은 결혼 후 애를 낳더니 더이상 피어나지 못했다고 그분들은 아쉬움이 잔뜩 밴 얼굴로 토로했다.
딸을 낳아보니 알겠어요. 여자는 참 많이 희생해야 하더라고.
그 말을 듣자 엄마의 삶을 살고 있는 나 역시 움찔할 수 밖에 없었다. 나 역시 희생하는 삶을 살고 있을까?
'아니다'라고는 차마 답하기가 어려웠다. 엄마가 되고난 후 내 삶의 많은 부분이 변화했으므로. 그리고 그 변화는 나를 성숙하게 했지만 '희생'이라는 키워드에 무게를 두고 바라본다면 난 분명 어느정도 희생하고 있는 게 사실이었으니까.
결혼을 했고 아이가 있기 때문에 했던 선택들이 있다.
대표적으로 미국에서 사는 일은 내가 '자녀가 있는 기혼자'였기 때문에 내린 결정이었다. 한국을 사랑하는 나로서는 절대 내리지 않았을 결정을 엄마인 나는 택했다. 그와 같은 결정에는 나 혼자 잘 먹고 잘 살기 위함이 아니라 가족 모두에게 좋은 쪽으로 인생의 방향성을 잡아야 한다는 생각이 기저에 깔려있었다. 아이들의 유년기를 미국에서 보내게 해주고 싶었고, 남편에게도 좋은 기회가 되리라고 생각했다.
나에게는? 기자로 살기에 미국보다는 내 나라가 훨씬 낫다. 비교할 수도 없다. 왜냐? 난 미국인이 아니니까. 난 이곳에서 소수자니까. 우리나라 기자들만 보더라도 타인종이 있던가? 난 본 기억이 없다. 그만큼 언론 업계는 굉장히 배타적이고, 보수적이다. 나로서는 내가 주류인 한국에서 기자생활을 하는 게 훨씬 좋다. 커리어 측면에서는.
하지만 워라벨의 측면에서는 미국이 좋다. 적어도 정시에 출퇴근을 하고, 추가 취재도 적고, 심지어 현재는 재택근무를 하고 있다. 재택근무는 아이를 키우는 워킹맘에게 최고의 복지다.
이 글에서도 드러나듯이 내 삶의 중심축은 가족이고, 아이들이다. 그래서 개인의 커리어 보다는 가정과 육아가 현재의 내게는 더 중요하다.
하지만 어르신들의 말씀대로라면 난 '피지 못한 꽃'이 될런지도 모른다. 나 역시 내가 아직 가야할 길이 더 멀다고 생각하고, 그 길을 지름길로 가지 못하고 빙빙 돌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때때로 우울하고 참담한 심정에 휩싸일 때도 있다. 왜 나는 바로 직진하지 못하나 싶어서.
하지만 코로나 시국 이후 미라클모닝으로 명상을 터득한 덕에 이전보다는 단단해진 내가 있다. 생각의 회로를 부정보다는 긍정에 초점을 맞춘다. 난 결코 피지 못한 게 아니다. 아주 천천히 피고 있을 뿐이다. 누구든 삶에서는 자신만의 때가 있다.
하늘 아래 모든 것에는 시기가 있고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 태어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긴 것을 뽑을 때가 있다.
코헬렛서 3장 1절의 8절. 인생이 퍽퍽하다고 느낄 때면 조앤 치티스터 수녀의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는 책을 어김없이 찾아 든다. 저자는 인생에서 다양한 때가 있고, 삶의 각 순간들이 연결돼 최종적으로 하나의 드라마가 되기에 의미없는 순간은 없다고 말한다.
출산한 여성이 결코 피지 못한 꽃이 아님을 그날 어르신분들에게 당당히 대답하지 못해 아쉬움이 남는다. 그리고 여성의 삶이 '꽃'에 비유된다는 사실 조차도 씁쓸함을 감출 길이 없다.
나는 지금 내 꿈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중이다. 사랑하는 나의 가족들과 함께 손 잡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