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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ris Seok Dec 17. 2022

옷장이 무너졌다

맥시멀리스트의 최후



옷장이 무너졌다.

말 그대로다. 어느날 옷장이 무너져버렸다. 이 글은 '맥시멀리스트의 최후'에 대한 단상이다.





두 아들을 학교에 보내고, 오전 재택근무를 끝낸 후 점심시간을 이용해 1층 차고에서 런닝머신을 한창 달리던 중이었다. 아이패드를 보며, 런닝머신을 타고 있는데, 갑자기 '쾅' 굉음이 들렸다. 바로 윗층에서 나는 소리같았는데, 워낙 큰 소리와 함께 진동이 울렸기 때문에 순간적으로 '이건 필히 지진이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LA에서 살면서 과거 몇 차례 지진을 겪었던 터라 지진부터 의심했던 것이다. 하지만 추가적인 소음과 흔들림은 없었다. 그렇다면 지진은 아닌데, 우리 집에 도둑이라도 들었나?


비장하게 휴대폰을 들고, 차고를 나와 남편에게 전화를 걸며 2층으로 향했다.


전화기 너머 남편에게 현재 상황을 설명했더니, 남편은 주택 외부에 설치해둔 링 카메라 영상을 확인했다. 남편은 아무도 우리 집에 침입한 흔적은 없다고 도둑이 든 건 아니라고 했다. 2층으로 올라가 보니, 평소의 모습과 똑같았다. 달라진 건 아무 것도 없었다.


차고 바로 위에서 소리가 났으니, 그 위치는 필히 안방 옷장이다 싶어서 옷장 문을 열었더니...


세상에나.

도둑이 왔다간 줄 알았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건지, 사태 파악을 하는 데 몇 초의 시간이 걸렸다.


그러니까 지금, 옷장이 무너진 것인가? 옷장이?


가까이 가서 봤더니 벽에 못으로 박혀있던 옷장의 한 부분이 옷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고 무너진 것이다. 조용히 옷장 문을 닫았다. 남편이 오기 전까지 혼자서 처치할 자신이 없었다. 뾰족한 못에 찔릴 것만 같아 겁이 났고, 무엇보다도 옷장이 무너진 모습은 내게 큰 충격을 안겨줬다. 옷장이 무너졌다는 사실 그 이상으로 그동안 나의 삶의 태도에 대해 진절머리가 났다.


어쩌면 무너진 옷장은 지금의 내 삶을 그대로 보여주는 단면인지도 몰랐다. 비우지 않고 계속 옷장에 옷을 채워넣기만 하다 보니 이 사단이 발생한 것이다. 정리하지 않고, 계속 옷을 채워넣기만 했다. 마음이 허할 때면 옷을 샀다. 옷을 구매하는 기쁨은 잠시일 뿐, 한 번 입고 나면 그 옷의 존재를 잊고 지냈다.


내 삶도 잡다한 생각과 기억으로 꾹꾹 눌려 담아지고 있는 것만 같았다. 마음을 비우고,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분명 필요한데, 나는 단 하루도 고요한 시간을 보내지 못하고 있다. 일이 없거나, 약속이 없는 날은 왠지 모르게 불안하기 때문에 대개 난 365일 내내 바쁜 스케줄을 소화하며 살고 있다.


하지만 알고 있다. 아무 것도 하지 않는 나태한 하루 정도는 때때로 필요하다는 사실을. 잠시 쉬면서 내 삶을 되돌아 보지 않으면, 언젠가 탈이 날 수 있다는 걸 나는 안다. 그럼에도 불안 감에 휩싸여 늘 바쁜 삶을 사는 쪽을 택하지만 말이다.


물건을 사는 일도, 삶을 살아가는 방식도 맥시멀리스트인 나는 결국 옷장이 무너지는 상황까지 왔다. 무언가 바껴야만 했다.




과거에 독서 토론회에서 '미니멀리즘'을 주제로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당시 한 패널은 자신을 맥시멀리스트라고 소개하며, 자신의 화려한 구매 이력을 줄줄이 늘어 놓았다. 자신은 앞으로도 미니멀리스트가 될 마음이 추호도 없으며, 맥시멀리스트인 자신을 사랑한다고 했다.


난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그녀의 당당함이 부러웠다. 난 스스로가 맥시멀리스트인게 언제나 부끄러웠기 때문에.



아마도 나는 채우기만 급급한 삶에 대해,

정리 불구인 나의 삶에 대해,

부끄러워하고 있는 것 같다.


옷장이 무너진 후로부터 일주일 후에야 옷장 정리를 했다. 한 가득 버릴 옷을 추려냈고, 조만간 중고 옷 판매점에 가져갈 예정이다. 하지만 아직 정리해야 할 옷은 산더미다. 내겐 끝내지 않은 과제가 여전히 남아있다.


글을 쓰고 있는 지금, 나를 둘러싼 서재도 지저분하다. 얼마 전에 구입한 책과 목도리, 아이들 장난감, 학용품, 최근 들고 나갔던 가방들이 책상 위에 엉켜있다.


정리가 되지 않은 옷장과 서재가 꼭 내 마음과 닮아있다.

2023년 새해가 얼마남지 않았다. 즉, 무언가를 계획하기 딱 좋은 시기가 오고 있다.

다가오는 새해에는 정리를 잘하는 사람이 되어 보겠다, 는 나로서는 불가능에 가까운 목표를 세워본다.


일단 비우기부터 시작해야겠다. 설레지 않으면 버려라, 라고 외치는 정리의 신 곤도 마리에의 정신이 내게도 깃들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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