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째 아들은 유독 기질이 예민한 아이였다. 돌이 되도록 깜깜한 곳을 무서워 해서 지하주차장은 내려가지도 못했던 아이. 새로운 장소에 대한 거부감이 심해 외출이 힘든 아이. 유치원에 다닌 지 반 년이 넘도록 등원길 차안에서 30분 내내 대성통곡을 하던 아이. 퇴근하는 엄마가 올 때까지 팬티에 똥을 싼 채로 유치원에서 울던 아이. 첫째는 그런 아이였다.
어디 가서 자기 자식 자랑 하는 엄마도 팔불출이라 별로지만, 어디 가서 자기 자식 흉을 보는 엄마도 별로이긴 마찬가지다. 난 어디 가서 내 자식 흉을 보는 엄마였다. 예민한 아이를 키우며 겪는 희노애락을 친구들과의 수다로라도 풀어놓지 않으면 마음 속에 쌓인 분노가 펑 하고 분출될 것만 같았으니까. 하지만 친구들 앞에서 아들의 예민함에 대해 불평불만 하다 집에 돌아오는 길이면 못난 엄마가 된 자책감에 휩싸였다. 부모가 자녀를 귀하게 여기지 않으면, 누가 내 아이를 귀하게 여겨줄까, 하는 마음. 그럴 때면 다음부터는 절대 내 아이를 흉보지 않으리라 다짐해보지만, 육아 이야기를 하다 아들 흉으로 빠지는 수다의 패턴은 좀처럼 쉽게 바뀌지가 않았다.
그런데 최근 들어 부쩍 첫째 아들의 예민함에 대해 토로하는 일이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는 걸 새삼 깨닫았다. 오히려 친구가 자녀를 키우며 겪는 어려움에 대한 고민을 듣고 집으로 돌아올 때가 많았다. 어쩔 때는 예민한 아이를 어떻게 키우면 되는지에 대해 조언을 해주기도 했다. 세상에. 내게도 이런 날이 오다니. 상대방은 물었다.
어떻게 아이의 예민함이 나아졌나요?
글쎄. 생각이 많아지는 질문이었다. 우리 아이가 언제부터 나아졌더라? 아마도 코로나19 팬데믹 시기 이후부터가 아니었나 싶다. 아들은 반년 동안 다니던 유치원 생활을 끝내 적응하지 못하고 코로나19 시대 키즈답게 집에서 약 1년 반이라는 시간을 보냈다. 그토록 유치원 다니기를 어려워했는데, 아이는 코로나 바이러스 덕분에 학교를 가지 않아도 된다며 기뻐했다. 그 때부터였던 것 같다. 아이의 뾰족하고 예민한 성정이 둥근 형태로 바뀌기 시작한 건.
솔직하게 고백해서 예민한 아이에게 엄마(또는 주양육자)의 존재는 절대적인 것 같다. 집밖에서 겪는 온갖 자극에 스트레스 받은 아이는 집으로 돌아와서야 안정감을 느낀다. 그리고 본래의 예민함을 마음껏 표출하며 ‘꾸며진 자아’로부터 ‘있는 그대로의 자기’로 되돌아온다. 아이가 가장 편안함을 느끼는 존재는 엄마. 아들은 언제나 엄마의 품이 그리웠는데, 재택근무 이전만 해도 난 늘 바깥으로 도는 엄마였다. 집에서 일하게 된 이후로 우리 둘은 몸을 자석으로 붙인 듯 하루 종일을 딱 붙어있었다. 신생아 때 이후로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렇게 1년, 2년이 지났고 어린 시절과 비교해 아들은 사회적인 생명체로 거듭났다. 아침마다 울던 아이는 이제 웃으면서 학교에 가고, 친구들과 시간 보내기를 가장 좋아한다. 시간이 약으로 작용한 것일 수도 있다. 나이가 먹을 수록 예민함은 깎여 나가는 사과 껍질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물론 아들은 여전히 예민하고 변화를 받아들이기 힘들어한다. 예를 들어 학원 가기를 꺼려한다. 친구들과 함께 시작한 태권도 학원에 가서도 아들은 4개월 내내 벤치에만 앉아있었다. 태권도에 대한 관심과 흥미는 높아서 친구들이 태권도 하는 모습을 유심히 쳐다보곤 했는데, 본인이 직접 참여하는 것은 어려워했다. 보다 못한 태권도 관장님은 개인 과외를 시도해보는 건 어떠냐고 제안해왔다.
첫째 아들이 가장 의지하는 건 하나 뿐인 3살 터울의 남동생. 남동생과 함께 태권도 2대 1 그룹 과외를 받게 된 첫째 아들은 그제서야 태권도 수업에 참여할 수 있었다. 4개월 동안 구경한 짬밥이 있어서 그런지 태권도 동작을 제법 잘 따라했다. 관장님은 첫째 아이에게는 ‘완벽주의’ 성향이 있는 것 같다고 했다. 아들은 8회 그룹 과외를 통해 본인이 태권도 동작을 다 숙지한 후에서야 다른 친구들과 함께하는 일반 수업에 참여할 수 있었다.
여전히 아들은 하교 후에는 늘 내 옆에 붙어 있는 껌딱지다. 그런데 그에게 기꺼이 껌딱지 역할을 해줄 수 있는 지금이 정말 감사하다. 모든 게 재택근무 덕분이라는 걸, 다시금 자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