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좌관으로 일을 시작한지 어느덧 4주차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시간은 잘도 흐른다. 워낙 바쁘게 살다 보니 사실 하루하루가 어떻게 지나가는지 잘 모르겠다. 이직 후 2~3일은 동료들 이름을 외우고, 내가 해야 할 일을 익히느라 몸도 마음도 분주했다. 그래도 어느덧 4주차에 접어들고 보니, 비교적 새로운 삶에 적응이 됐다. 4년간 재택근무를 했던 터라 어떻게 매일 출퇴근을 하는 삶을 살아야 하나 적잖이 걱정했지만,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이제는 재택근무를 하던 과거의 삶이 까마득하게만 여겨진다.
최근 캘리포니아주에는 폭우 소식이 있었다. 일부 지역에서는 역대급 폭우 기록이 세워지기도 했고, 이에 따라 LA 지역 주민들은 홍수 관련 경보령을 통보 받기도 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LA시는 비상사태를 선포했고, 나는 일요일 밤 사수로부터 ‘폭우로 인해 월요일 재택근무를 한다’는 갑작스러운 통보를 받았다. 아니, 이렇게 기쁜 일이. 이직을 한 후 재택근무는 꿈도 꿔보지 못했는데, 생각지도 못한 선물 같았다.
대부분의 유치원과 학교는 정상 운영을 했기 때문에 두 아이를 학교에 보낸 후 오전 8시30분부터 남편과 나란히 집에서 재택근무를 했다. 남편은 1층 사무실에서, 나는 2층 서재에서 각자의 업무를 봤다. 스피커로 비 오는 날 듣기 좋은 잔잔한 음악을 틀어 두고, 남편이 내려준 라떼를 마시며 이메일을 확인하고, 오늘 내가 해야 할 일들에 대해 정리하는 시간을 가졌다.
과거의 재택근무 보다는 훨씬 더 여유로웠다. 기자였을 때는 매일 마감해야 하는 기사가 적어도 3~4개씩은 있었기 때문에 아이템을 찾는 것부터 시작해서 기사를 마감하기까지 늘 조급하고 압박감을 느껴야했다. 매일 내가 써야할 기사가 명확히 존재했기 때문에 재택근무를 하나 사무실에서 일을 하나 일의 강도는 유사했다. 즉, 농땡이 치기가 어렵고, 어떤 식으로 근무하든 간에 아웃풋은 유사하다.
반면 새로운 직장에서는 매일이‘내가 찾아서 해야 하는 일’로 채워진다. 특별한 행사, 미팅 등의 업무가 아닌 이상 내가 그날 꼭 해야 하는 일은 없다. 오늘 하지 못한 일을 내일 해도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기자로서 4년 동안 재택근무를 해왔고, 재택근무의 효용성에 대해 극찬해왔으면서도 새로운 일자리에서의 재택근무는 어딘가 어색했다. 남편에게 “사무직이 매일 재택근무를 하면, 일의 아웃풋이 상당히 떨어질 가능성이 높겠다”고도 덧붙였다.
어쨌든 그날 난 매우 여유로웠다. 새로운 곳으로 이직한 후 처음 가져본 여유 시간이었다. 미국도 선거 시즌이라 주말에는 선거캠페인에 참여해야 했기 때문에 주중에도 그리고 주말에도 나만의 여유 시간이란 전혀 없었다. 잠들기 전에 침대에 누워 보내는 10분~20분 남짓한 자유시간이 내게 허가된 자유의 전부였다.
그렇다 보니 비 오는 날 내 서재에서 보내는 시간이 어찌나 좋았는지… 마음이 하루 종일 조용한 흥분상태에 머물러 있었다. 집 안에서 고요히 보낼 수만 있다면 ‘비 오는 날’은 천국처럼 평온하다.
점심은 남편이 해준 짬뽕라면을 먹으며, 미뤄왔던 둘만의 수다를 오붓하게 떨 수 있었다. 아마도 그날의 재택근무는 전날 비가 오는데도 우비를 입고 선거 캠페인을 뛰어야 했던 직원들을 향한 일종의 보상 시간이 아니었을까 싶다. 덕분에 크게 힘을 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