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초등학생이던 시절, 엄마는 동네에서 작은 영어방을 운영했다. 지금은 사라지고 없지만, ‘미세스키’라고 불리는 프랜차이즈 영어 학원이었다. IMF 시기에 가세가 기울자 영어를 전공한 엄마가 집에 영어방을 차려 학생들을 가르치기 시작한 것인데, 엄마의 영어방은 동네에서 인기가 꽤나 좋아 우리집에 영어를 배우기 위해 드나드는 학생은 수십명에 달했다.
엄마말에 따르면 내성적이던 내 성격이 당차게 바뀐 건 그 무렵부터였다. 친구들은 우리 엄마를 ‘선생님’이라고 불렀고, 난 선생님의 딸이었다. 엄마가 선생님인건 꽤나 근사한 일이었는데, 그건 내가 수업 시간에 별다른 긴장을 하지 않고, 편한 감정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었다. 말하자면 학교에서는 조용하게 지내던 내가 그룹 안에서 '대장' 노릇을 할 수 있게 됐다는 거다. 또래 친구들 4~5명과 엄마에게 영어 수업을 받으며, 내 성격은 날로 쾌활해져갔다.
엄마가 영어방을 운영하던 그 때, 가장 기억에 남는 건 매년 친구들과 1박2일로 갔던 에버랜드 여행이다. 그야 말로 '여행'이었다. 여행짐을 싸서 1박2일로 에버랜드에 있는 통나무집에 1박을 하러 가는 것이었으니까. (글을 쓰며 아직도 에버랜드에 통나무집이 있나 검색해 보니, 현재는 '에버랜드 홈브리지 캐빈 호스텔'로 운영 중에 있다. 이렇게 반가울수가. 블로그에 올라온 사진을 보니 숙소 안의 모습이 그 시절 그대로다.)
내 친한 친구들은 대부분이 우리 엄마에게 영어를 배우고 있었으므로, 나는 친구들과 함께 '미세스키'에서 주최하는 에버랜드 썸머 캠프에 매년 1박2일로 갈 수 있었다. 그건 학교에서 가는 수련회를 제외하면, 1년 중 친구들과 유일하게 외박을 할 수 있는 기회였다. 심지어 학교에서 가는 수련회와는 다르게 우리에게는 무한 '자유시간'이 주어졌다. 놀이동산에서 1박2일 동안의 자유시간이라니, 과자집에 들어간 헨젤과 그레텔의 심정이 우리와 같지 않았을까? 그야말로 별세계였다.
친구들과 나는 1박2일 동안 온갖 놀이기구를 타고 또 타며 행복감을 느꼈다. 게다가 놀이동산에서 사먹는 음식은 왜 그리도 맛있던지. 슬러시, 츄러스, 버터구이 오징어를 사먹으며 놀이기구 줄을 서서 친구들과 별 것 없는 이야기에도 깔깔 거리며 웃던 장면이 여전히 눈에 선하다. 놀이동산을 가는 일은 초중고 시절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일 중 하나였고, 난 기회만 되면 친구들과 롯데월드, 서울랜드를 향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다. '엄마'가 된 이후에는 놀이동산에 가는 일이 도통 즐겁지가 않다. 가기 전부터 피곤함을 느끼는가 하면, 막상 놀이공원에 가서는 기가 빨려 맥을 못 춘다. 그 좋아하던 '롤러코스터'를 타는 데도 흥이 오르기는 커녕, 속이 울렁거린다. 나이가 들면서 체질이 변하는 것일까? 왜 나는 놀이기구를 타면서도 흥을 느끼지 못하는 어른이 되어버린걸까?
아무래도 이제 놀이동산은 나를 위해서가 아닌 지극히도 아이들을 위해 방문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놀이동산에 가면 난 이제 아이들의 아바타가 되어, 아이들이 원하는 곳으로만 나아갈 수 있다. 게다가 놀이동산에 사람들은 너무도 많고, 그 수많은 인파 속에서 혹여 아이들을 잃어버릴까, 아이들이 다칠까 전전긍긍한다. 내가 원하는 대로, 나의 '주체성'을 가지고 돌아 다니지 못하는 놀이동산은 더이상 과거에 내가 좋아하던 곳이 아니다.
최근에도 아이들과 놀이동산을 가서 그런 생각에 빠져들었다. 아, 사람이란 얼마나 이기적인 동물인가 하고. 내가 낳은 아이들인데도, 나는 아이들 보다도 '나'를 위해서 놀이동산에 갔을 때가 더 기쁘구나, 싶어서 기분이 이상했다. 어쩌면 내 모든걸 주어도 아깝지 않은 존재는 자식이 아니라 오직 '나'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 부끄럽기도 했다.
그런데 놀이동산이 힘들어진데는 노화와도 관련이 있는게 아닌가 싶다. 이전에는 바이킹의 움직임에 짜릿함을 느꼈는데, 이제는 울렁거리기만 한다. 롤러코스트를 타며 몸이 좌우로 흔들리다, 가끔씩은 목이 삐끗하기도 한다.(결국 침을 맞으러 가야했다) 이게 다 나이가 들어서 그런게 아닐까...?
육아로 인한 자유 박탈과 노화 등의 이유로 난 이제 더이상 놀이동산을 좋아하지 않는 어른이 됐다.
그런데 솔직히 말하면, 아직도 놀이동산의 화려하고 몽환적인 분위기는 좋아한다. 막상 가면 힘들지만, 놀이동산에 가기 하루 전이면 약간은 설레곤 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