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일요일 저녁, 갑자기 뒷좌석에 타있던 둘째 아이가 춥다고 말했다. 춥다고? 이 여름 날씨에? 순간 불길한 예감이 엄습했다. 아니나 다를까 집에 도착하자 마자 아이의 체온을 재보니 미열이 있었다. 밤부터 열이 나기 시작했으니, 다음날 아침까지도 열이 날 확률이 높았다. 지난 일주일 동안 콧물을 훌쩍이던 둘째는 결국 감기에 걸리고야 말았다. 유치원에 다니며 아이가 아픈 일은 다반사여서 크게 놀랄 일은 아녔지만, 문제는 아픈 아이를 집에서 누가 돌볼 것이냐였다.
현재 우리는 달랑 네식구만 미국에서 거주하고 있다. 다른 가족, 친지들은 모두 한국에 있으므로 우리가 갑작스럽게 도움을 청할 곳은 단 한 곳도 없다. 당연히 나와 남편 둘 중 한명이 아픈 아이를 돌봐야했다. 나와 비교해 재택근무가 자유로운 남편이 월요일부터 출근을 하지 못하고 아이와 함께 집에 머물기로 결정했다. 아무리 재택근무가 자유롭다고는 하나, 월요일에 처리해야할 일들이 잔뜩 쌓여있을텐데, 재택근무를 하는 마음이 편하지 않을 남편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미안한 감정과 동시에 안도감이 찾아왔다. 그래도 남편과 나, 둘이서 일을 하는 동시에 아이들도 우리 손으로 책임질 수 있다는데서 오는 안도감. 지난해까지는 5일 중 4일을 재택근무로 일하던 내가 주로 육아를 도맡아 담당해왔고, 내가 풀타임 출근하는 직장으로 이직한 올해부터는 남편이 시시때때로 재택근무를 하며 우리 가정을 돌보고 있다. 남편과 나, 둘 중에 적어도 단 한 명은 재택근무가 가능해야 타인의 도움없이 자녀를 돌볼 수 있다.
둘째의 감기가 그저 하루 이틀이면 사라지길 바랐지만, 마음과 달리 상황은 점차 심각해졌다. 일요일 밤부터 아팠던 둘째는 수요일까지 학교를 가지 못했다. 그리고 수요일 밤에는 내게 감기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윽고 이마에서 열감을 느꼈고, 밤새 오한에 시달렸다. 몸살에 시달리는 와중에도 선잠을 자며 남은 한주를 어떻게 보내면 좋을지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목요일, 금요일, 토요일, 일요일까지 빡빡한 스케줄로 가득 차있는데, 몸이 아파도 너무 아프니 이를 어쩌면 좋지… 금요일, 토요일에 있는 행사는 내가 주관한 행사여서 빠질 수도 없는 처지인데, 그냥 울고만 싶었다.
올해 들어 이렇게 지독하게 아픈게 벌써 두번째다. 지난달에도 목이 부풀어 올라 항생제를 꼬박 10일 동안이나 먹었다. 그런데 한달만에 또 이렇게 꼼짝달싹 못할 수준의 몸살이 찾아오다니. 체력 하나만큼은 자신이 있었는데, 이직 후 빡빡한 스케줄에 몸이 감당하지 못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육아를 하지 않고 일만 하는 상황이었다면 이 정도 스케줄이야 거뜬했을 것만 같은데, 지금의 나는 그동안 쌓아온 체력을 조금씩 갉아먹으며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는 것만 같다.
슬프게도 몸살은 온 가족에게 전염됐다. 둘째가 괜찮아지자 마치 계주 선수처럼 나, 남편, 첫째 아들 순으로 몸살 증상의 바톤을 이어받았다. 열이나고, 온 몸이 두드려 맞은 듯이 아프고, 목이 찢어진 것만 같은 통증을 느끼는 게 이 병의 공통적인 증상이었다. 대체 무슨 바이러스이길래 이토록 지독한지, 바이러스를 향해 욕이라도 내뱉어 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남편과 나는 코로나에 감염됐을 때보다도 훨씬 더 아팠다. 남편은 목 통증이 너무 심해서 밤새 잠이 들지 못할 수준이었다. 진통제를 먹어도 2~3시간이 지나면 극심한 통증이 찾아왔다.
이와중에도 나는 약빨로 버티며 겨우 일을 나갔고, 남편은 일을 나간 나대신 아이들을 돌봤다. 이와중에 무슨 일이냐 싶었지만, 내가 책임지는 행사들이 있어 도저히 회사를 안 갈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회사 상사는 내 컨디션이 좋지 않은 걸 알고, 오전 행사가 끝나면 일찍 퇴근이 가능하게끔 배려해주셨다. 조기 퇴근이 다행이긴 했으나, 그걸로는 도저히 병이 나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열이 내려가자 두통이 찾아왔고, 아이들의 컨디션은 돌아왔지만, 남편의 증세는 더욱 클라이막스로 치달았다.
남편과 나, 그리고 아이들까지 전 가족이 아픈 비상상황에 처하자 타지에 살고 있다는 게 더욱 처참하게 실감이 났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 가족을 돌봐줄 사람 하나 없다니. 한국이었다면 친정 부모님에게 바로 전화했을텐데…그랬더라면 육아라는 무게라도 줄일 수 있었을 거고, 남편과 나는 푹 쉴 수 있었을 거다. 그뿐인가. 아파트 상가 내과에 가서 병명에 알맞은 약만 지어먹었어도, 이처럼 몇날 며칠을 아팠을까…? 하다못해 수액이라도 맞았을텐데.
맞벌이 가정으로 누구의 도움없이 홀로서기 한다는 건 평소엔 그럭저럭 할 만했는데, 몸이 아프자 보통 일이 아니란 생각이 든다. 아이를 양육하는 세상의 모든 맞벌이 가정이 유사한 일을 겪었고, 겪고 있을 것이며, 앞으로도 겪어나가야만 한다.
아이들이 어느 정도 성장할 때까진 어떻게든 버텨야만 하는 상황인데, 그러기 위해서는 탄탄한 면역력을 평소에 키워두는 수밖에 없다. 잘 먹고, 푹 자고, 땀 흘리며 운동하기... 이번 감기가 다 나으면, 어렵지만 일상에서 건강 수칙을 지키며 살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