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운명이 이름 따라간다.
살면서 그런 말을 종종 들어봤다. 이름이 가진 의미에 따라 한 사람의 운명이 그려진다는 말.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갓 태어난 아이에게 이름을 지어줄 때 고심하곤 한다. 21세기에 작명소가 아직까지도 성행하는 이유고. 게다가 이름의 중요성은 비단 사람에게만은 아니다. 배우로 치자면 그들이 찍은 '드라마' 또는 '영화' 등 작품의 이름에 따라 그 배우의 다음 여정이 이어진다는 말도 있다.
사람의 운명이 이름을 따라간다는 말을 최근 몸소 실감했다. 다름 아닌 내 영어 이름의 뜻을 제대로 알고나서였다.
내 영어이름은 브런치 작가명에서도 사용되듯이 IRIS(아이리스)다. 지난 편에서 언급했듯이 내가 초등학생이던 시절 엄마는 '미세스키'라는 영어방을 운영하는 영어선생님이었고, 내게 손수 영어이름을 지어주셨다. 엄마는 당시 아이리스라는 이름을 내게 지어주며, "아이리스는 무지개라는 뜻이야! 무지개처럼 여러 색채를 가진 아이로 성장하면 좋겠다"고 말했던 기억이 난다.
난 처음부터 내 영어이름이 좋았다. 솔직히 한국 이름 보다 영어 이름을 훨씬 더 좋아했다. 왜냐하면 내 한국 이름은 발음이 어려워서 매번 반이 바뀔 때마다 담임선생님이 내 이름을 이상하게 발음하는 일이 종종 잇따랐고, 그때마다 어린 마음에 부끄러움을 느꼈다. 아, 내 이름은 왜 이렇게 어려운 걸까! 조금 더 쉽고, 흔한 이름이었다면 이런 창피함을 겪지 않아도 됐을 텐데, 라는 마음. 그건 성인이 되어서도 이어졌는데, 전화로 내 이름을 언급하면 상대는 대개 한 번에 알아듣지 못하고 두, 세번씩 내 이름을 재차 물었다. 아, 이름은 필히 쉽게 지어야하는 것이다!!
엄마한테 왜 내 한국 이름을 왜 이리 발음이 어려운 이름으로 지었냐고 따져 물을 때면, 엄마는 외할아버지 탓을 하곤 했다. 본래 작명소에서 받아왔던 내 이름은 발음이 훨씬 더 쉬운 이름이었는데, 외할아버지가 먼 친척 중 한 명의 이름과 겹친다며 그 이름을 반대했고, 이윽고 외할아버지는 다른 작명소에서 지금의 내 이름을 받아왔다고 한다. 그렇게 난 '인희'란 이름을 가지게됐다. 내 성까지 붙여 '석인희'인데, 읽어보라. 발음이 쉽지 않다...이름의 한자뜻은 이러하다. 어질인, 밝을희. 어질고 밝은 사람. 그래 뭐, 타인에게 큰 피해는 주지 않고 비교적 밝게 살아왔으니 내 삶의 모습과 어울리기는 한데, 사실 그닥 큰 감명은 없다.
그런데 어릴적부터 좋아하던 내 영어이름은 달랐다. '무지개'라는 뜻이라니! 게다가 발음이 명확하다. 유학생활을 시작한 이후로 미국에서는 줄곧 '아이리스'로 살고 있는데, 어딜가서 내 이름을 말하면 상대방은 한 번에 알아듣곤, "이름이 너무 이쁘다!"는 칭찬이 대개 돌아온다. (실제로 오늘만 해도 스타벅스에서 커피를 주문하며 내 이름을 말하자, 상대방이 '이름이 너무 이뻐!'라며 감탄 또 감탄을...) 내가 한국 이름에서 원하던 것도 이런 반응이었다. 상대방이 한 번에 내 이름을 알아들어 주는 것. 한국에서는 내 이름을 말할 때마다 발음을 또렷하게 하려고, 약간의 긴장감을 느끼곤 했는데, 영어 이름을 말할 땐 그러지 않아도 돼서 좋다.
기자로 지낼 때도 외국계 취재원을 만날 때면 종종 '아이리스'라는 이름을 사용했지만, 주로 사용된 건 당연히 한국이름이었다. 기사 바이라인도 언제나 '석인희 기자'로 나갔으니, 기자의 삶에서는 한국 이름이 지대한 역할을 했다.
그런데 올해 이직을 한 후부터는 하루에 내 한국이름을 들을 일이 아예 사라져 버렸다. 집에서도 남편에게는 자기야(사실 거의 호칭을 불릴 일이 없다), 아이들에게는 엄마라는 호칭을 들으니, 내 한국이름이 존재할 공간은 거의 사라졌다고 봐도 무방하다. 가끔 친구들을 만날 때에야 들을 수 있는 이름이랄까.
반면 영어이름은 내 삶의 중심부로 옮겨졌다. 하루에 수십통씩 'Hi Iris'로 시작되는 이메일을 받고, 동료들에게 Iris라고 불린다. 미국 사회에서 나는 'Iris'라는 새로운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얼마전 내가 일하고 있는 지역구 웹사이트 Staff 소개란에도 Iris, Field Deputy라고 소개된 나를 보며, 나는 내가 'Iris'라는 사실을 보다 더 온전히 받아들였다. 그렇구나. 이곳에서 나는 새롭게 살아가고 있구나...
그래서 문득 내 이름의 의미가 궁금해졌다. 엄마가 '무지개'라는 의미에 꽂혀 내게 이 이름을 줬다고는 하는데, 그게 사실이 맞는지 궁금증이 일었다. 검색창에 Iris 이름의 뜻을 검색해 보니, 다음과 같은 설명이 나왔다.
고대 그리스로마 신화에서 아이리스는 신들과 인간들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 무지개 여신으로 주로 '메시지'를 전달하는 역할을 했다.
무지개 여신 아이리스가 신과 인간 사이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역할을 했다는 데서 감탄이 나왔다. 내가 오늘날 살아가는 모습을 그야말로 함축해 놓은 설명이 아닌가 해서. 현재 내 일은 LA시의원의 보좌관으로 미국 주류 정치와 한인사회에 다리를 놓는 역할이다. 말 그대로 '메시지 전달자'인 셈인데, 어쩜 '전달자'로서의 삶은 내가 인생 전반에서 꾸준히 추구해야 할 방향성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신이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일지도 모를 어떤 긍정적인 메시지들을 글과 말로 이 세상에서 전달하는게 한 평생 내가 하고 싶은 일이다.
앞으로도 내 영어 이름의 뜻대로 살아가고 싶다. 그나저나 우리 두 아이의 이름 뜻은 뭐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