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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ris Seok Oct 07. 2020

출산을 앞둔 친구에게

출산 후 삶에 관하여

언니, 

출산을 앞두고 어제 참을 수 없이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고 했어. 출산에 대한 두려움만은 아니었다고. 복합적인 감정이 들었는데 설명하긴 참 힘들다고. 집에서 온라인으로 수업을 듣고 있는 첫째 몰래 화장실에 가서 눈물을 훔쳐야 했던 언니의 마음은 어떤 것이었을까. 


이미 첫 아이를 낳아 키워본 언니이기에 출산 후 다가올 어려움들에 대해 너무 잘 알고 있지. 첫째 아이를 낳을 때만 해도 마냥 모든 게 새로워서 두렵긴 했지만 그보다도 설렘에 압도됐잖아. 모유수유가 얼마나 힘든지, 잠을 못 자는게 얼마나 괴로운 일인지, 아이를 위해 내 하루를 온전히 받쳐야 하는 일이 어떤 일인지를 모르고 시작했기 때문에 정신차리지 못하고 어안이 벙벙한 채로 그 시간들을 견뎌냈지.



그런데 둘째를 맞이하는 느낌은 참 달라. 이미 그 힘든 삶에 대해 너무나 잘 알고 있잖아. 둘째를 낳은 후에 적어도 2년 동안은 내 삶이 없다는 것, 영위하던 일상은 송두리째 사라진다는 것, 첫째 아이에게만 주던 사랑을 양분해야 한다는 것 등 슬픔을 느낄만한 이유는 셀 수 없을 정도지. 더구나 코로나 시기에 외출도 힘든데, 집에 꼼짝없이 갇혀 독박 육아를 하게 생겼으니 언니의 마음이 참 무거울 거야. 지난 행복했던 시절과의 안녕을 해야만 하니까 그 작별 앞에서 설명할 수 없을 묘한 슬픔이 울컥 차올랐을 것 같아. 



물론 둘째는 예쁘지. 눈에 넣어도 안 아픈 아이라는 말이 괜히 나왔겠어. 막내들은 특유의 귀여움을 타고나는 것만 같아. 언니도 내 아들 중에 막내 아이를 특히나 귀여워하곤 하잖아. 막내 아이의 천진난만함이랄까, 그런 게 있어. 첫째와는 달리 질투 없이도 사랑을 온전히 받아내는 둘째는 태어날 때부터 어쩌면 사랑받는 대상으로서 더 우위에 있는지도 모르겠어. 


게다가 언니의 둘째는 딸이잖아. 막내딸, 듣기만 해도 어감부터 사랑스럽다. 아들만 둘을 가진 나는 딸의 귀여움이 어떤 건지 전혀 모르지만 상상만으로도 미소가 번져. 왜 있잖아, 내가 지난 몇 달간 한창 ‘딸 앓이’를 했었던 거 기억하지. 육아에 몹시도 지쳐있는 나지만 셋째를 잠시라도 고려했을 만큼 당시 나는 딸이 가지고 싶었어. 



딸에 대해 막연히 생각을 해봤는데 해주고 싶은 게 참 많더라고. 옷만 봐도 아들과 딸을 대하는 내 마음은 다르니까. 아들들은 그냥 편한 거 입혀주고 싶어. 어차피 아무 데나 앉고 지저분한 먼지를 잔뜩 묻혀올 애들이니까. 그런데 딸은 달라. 공주같이 입혀주고 싶은 거 있지. 핑크핑크하고 공주공주한 그런 것들. 언니도 임산부때부터 태어날 딸을 위해 소녀풍 헤어밴드들을 끝없이 사 모았으니 내 마음 정확히 뭔지 알지. 



딸은 성별이 나와 같아서 그런지 마치 내 분신인 것만 같아. 내가 살면서 못해본 것들. 그래서 아쉬운 것들을 딸에게는 다 해주고 싶은 마음이 들더라고. 이를테면 내가 살아보지 못한 삶을 딸에게 선물함으로써 내가 다시 한 번 이 생을 살아가는 것처럼 느껴진달까. 내가 나를 키워내는 느낌일 것만 같아. 


내가 자기애가 강한 사람이라 그런지는 모르겠는데, 딸이 내 분신처럼 느껴지는 만큼 딸에겐 모든 걸 해주고 싶더라. 이미 태어난 내 두 명의 아들들에겐 좀 미안한 말이지만, 나에게 딸이 있었다면 아들들 보단 훨씬 더 공들였을 것 만큼은 분명해. 



뭐 어차피 난 딸이 없잖아? 아들들이나 잘 키우라고 하늘이 내게 딸은 허락하지 않으셨나봐. 




언니. 지난해에 우리 집에 갑자기 들렸을 때 있잖아. 그때만 해도 언니에겐 둘째가 없었는데, 언니는 오랜만에 만난 나에게 지금의 삶이 참 감사하고 행복하다고 했어. 언니의 그런 표정은 처음이어서 나에게까지 언니의 꽉 차오르는 행복감이 전해졌을 정도야. 언니의 20대를 고스란히 옆에서 지켜봤기 때문에 난 언니가 얼마나 힘들게 그 시절을 관통해 왔는지 알잖아. 그래서 30대의 워킹맘인 언니가 느끼는 평온함에 나까지 덩달아 감사한 마음이 들더라. 일도 하면서 육아에 집안일까지. 언닌 슈퍼우먼으로서 살고 있었는데, 그 모든 일이 어느 정도 궤도에 올랐는지 워킹맘의 일상에서 큰 행복을 느낀댔지. 



이제 다시 둘째를 낳고 기약할 수 없는 육아휴직에 돌입했으니 막막할 거야. 일을 하던 스스로를 좋아하던 언니였으니까. 결혼 전만 해도 언닌 전업주부로서 삶을 살고 싶다고 했었는데, 막상 첫째를 낳고 전업주부로 살다 보니 어느 날 문득 언니의 자신감이 바닥으로 떨어져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했어. 남편이 벌어오는 돈만으로 살다 보니 경제적으로도 약간의 부족함을 느꼈지만, 그보다도 스스로 돈 한 푼 벌 수 없다는 사실에 무능력함을 마주하게 됐다고 했지. 당시 미혼이었던 내가 볼 때 언니는 이미 집 안에서 충분히 많은 일을 해내고 있었는데도, 자신이 아무 것도 생산하지 못한다는 이상한 자책감에 시달려야 하다니 참 슬픈 일이라고 생각했어. 



첫째가 유치원을 갔을 때쯤 언니도 다시 세상 밖으로 나왔는데, 작은 돈일지라도 스스로 돈을 벌 수 있다는 사실에 느끼는 만족감이 큰 것 같더라. 당시 언닌 점심시간에 식후 마시는 커피만으로도 행복하다고 했지. 아침마다 화장을 하고, 외출복을 입고 출근준비를 하는 일만으로도 마음 속에 차오르는 무언가가 있다고도.



난 워킹맘의 삶이 시소를 타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해. 일과 육아 둘 사이에 적당한 균형감이 이뤄져 시소가 어느 한 쪽으로도 치우치지 않고 평평하게 수평을 이룰 땐 참 행복하단 생각이 들잖아. 일도 하고, 사랑하는 아이들도 키우니 더 바랄게 없을 정도지. 하지만 일과 육아 그 어느 쪽에서든 무게가 조금이라도 더 실어지면 다른 한쪽이 버거워지잖아. 그럴 땐 지옥도 이런 지옥이 따로 없지. 일상의 모든 순간에서 만족감이라곤 온데 간데 없고 얼굴은 구겨지기 일쑤야. 사랑하는 아이들한테도 버럭 화를 내는 순간이 잦아지고, 또 그 후엔 죄책감에 괴로운 감정을 느끼곤 하니까. 



그런데 또 이렇게 살아가다 보면 언젠가 시소가 균형을 이루는 때가 주기적으로 오지 않겠어. 20년 견디면 애들이 대학을 갈 테고, 우리도 그토록 원하던 자유의 몸이 된다. 코로나 때문에 이번 한 해가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가 버렸는데, 이런 삶의 속도라면 조만간 20년 쯤은 금방 흘러 홀랑 사라져버릴 것만 같아 두렵기도 해. 우리 자유의 몸이 되면 그 때 20대 때 그랬듯이 여행을 가자. 인근에 여행갈 곳은 얼마든지 많으니까 근사한 휴양지 호텔에 가서 칵테일 한 잔씩 마시며 서로 고생했다고 토닥거려 주자. 



우린 그 때쯤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지금과 크게 달라질 건 없겠지만(또 모르지), 그래도 일과 육아 모두 포기하지 않고 나름의 균형감을 맞추며 잘 살아낸 후였으면 좋겠다. 무엇보다도 가족들 모두 건강하고, 아이들이 멋지게 성장해 주었으면 좋겠네. 다 큰 아이들을 바라보는 우리는 어떤 마음일까. 지금의 우리의 키 보다도 더 큰 아이들이라니, 상상이 안된다. 



아무튼 2~3일 안에 둘째를 낳으러 갈 언니야. 병동에 들어가자 마자 코로나 진단검사를 받아야 하고, 보호자도 출입이 힘들어 혼자 있어야 하고, 집에 아빠와 단 둘이 있을 첫째 아이도 걱정해야 하고 견뎌야 할 일들이 첩첩산중이지만 다 지나갈 거야. 첫째 아이를 키울 때도 그랬듯이 언니는 훌륭하게 둘째도 키워낼 거야. 두 아이의 엄마인 언니가 자랑스러워. 



달콩이가 보고싶은 이모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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