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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ris Seok Sep 25. 2020

'OO맘'으로 불리길 거부한다

내 이름을 불러줄 때, 난 꽃이 되었다.

친하게 지내는 후배가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집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다 ‘비즈 공예’라는 새로운 취미가 생겼다며, 최근 손수 만든 팔찌를 선물해줬다. 나에게는 그저 구슬로만 꿰어져 있는 팔찌를, 얼마전 아이를 출산한 다른 선배에게는 OO맘이라는 알파벳이 새겨진 팔찌를 선물했다.


선배는 OO맘이라고 불리기를 원하지 않을 것 같아 구슬로만 만들었어요



나를 이토록 잘 파악하는 후배라니!!



그랬다. 나는 아이 둘이나 출산한 지금도 누구누구의 엄마라고 자신을 소개하는 일에 익숙하지 않다. 가끔씩 아이 유치원 학부모 모임에 참가할 때에만 나를 OO의 엄마라고 소개하게 되는데, 어색하기만 하다. 이 세상에 나라는 고유한 존재가 소멸해 버리고, OO라는 아이의 부속품으로써만 기능하는 느낌이랄까.



첫째 아이를 낳은 후,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에 일부러 아이 사진을 올리지 않았다. 내겐 보석같이 반짝 반짝 빛나는 아이였지만, 프로필 사진 마저 내가 아닌 아이의 얼굴로 채워버리면 나라는 존재가 사라질 것 같았다. 그저 나로서, 나의 모습을 드러내고 싶었다. 프로필 사진인 만큼 내 사진이 그곳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조금 더 솔직하게 고백하자면 과거의 나에게 첫째 아이의 존재는 아킬레스건이나 다름없었다. 결혼 후 4개월 만에 계획없이 덜컥 들어섰던 아이. 처음 임신 사실을 알고서 심장이 쿵 발바닥으로 떨어 지는 듯한 깊은 절망을 느꼈다. 도저히 말도 안된다며 엄마와 함께 집 근처 산부인과를 찾았고, 의사선생님께선 이미 임신 5주차라며, 아기집이 보인다고 하셨다.



아이라니…내게 아이라니!



구겨지는 내 얼굴에 의사선생님께선 ‘낙태를 원하시면 병원을 알아보세요’라고 말하셨는데, 순간 낙태에 대한 고민을 하지 않았던 건 아니었다. 하지만 이미 배 속에 들어선 아이를 인공적으로 지우는 선택은 차마 할 수가 없었다. 운명처럼 내게 온 아이를 어찌 저버릴 수가 있단 말인가. 게다가 난 결혼한 상태였고, 아이를 지울 만한 타당한 이유는 없었다. 받아들이는 일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하지만 운명이라고 두 팔 벌려 순응하기엔 너무 참혹했다. 내 나이는 갓 스물 여덟로 바뀌어 있었고, 신분은 대학원생이었다. 언론고시를 본격적으로 준비하려던 차였고, 그 해에 논문을 완성해 대학원도 졸업해야 했다. 무엇보다도 난 하고 싶은 일이 무척이나 많은 사람이었다. 기자가 되어 현장의 이곳저곳을 마음껏 누비고 싶었고, 남편과 세계 여행도 실컷 하고 싶었다. 굳이 아이를 갖게 된다면 커리어가 3~5년 정도 쌓인 후에, 그때에서나 고려 정도는 해 볼 수 있는 일로 여겼다.



앞서 스물 일곱이라는 비교적 이른 나이에 결혼을 해야한다는 사실에 불만을 느꼈던 것도 내 커리어에 방해가 될까 두려워서였다.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 1순위는 ‘일’이였고, 일을 제대로 시작도 해보기 전에 ‘기혼녀’라는 주홍글씨를 새기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간절히 결혼을 원하는 남편의 끈질긴 설득 끝에 결혼까지는 허락했으나, 엄마가 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갑자기 내 인생에 다가온 아이의 존재는 내게 크나큰 약점이었고, 숨기고 싶은 일이었다. 마치 내 인생이 망한 것처럼 느껴졌다. 지금까지 쌓아온 노력들이 단숨에 무너져 내렸다고 생각했다. 친구들 그 누구에게도 임신 사실을 알리지 못했을 정도로 현실을 부정했다.





임신 5개월 차쯤, 커뮤니케이션 비판이론 수업시간에 ‘여성의 삶’이라는 주제에 대한 토론 시간이 있었고, 난 ‘여성이 어린 나이에 결혼을 하면 많은 사람들이 ‘취집(취업 대신 시집)’을 한 듯 바라본다. 21세기에도 여성은 결혼=전업주부라는 부조리한 편견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의견을 말하며 수업 시간 도중 눈물을 흘리고야 말았다. 그 때 내 마음 속엔 큰 응어리가 있었던 것 같다. 세상에 보여주고 싶었다. 여자는 결혼을 하고 애를 낳아도 일을 하며 살아가는 주체적인 존재라는 사실을.



고통 속에서도 이성적으론 알고 있었다. 인생이 끝난 건 아니었다. 임신기간 동안 논문을 마무리하고, 출산 후 언론고시를 합격해 기자가 되면 된다. 하지만 겁이 났다. ‘기혼녀’와 ‘엄마’라는 프레임에 스스로 갇혀 있었던 것이다. 되돌아 보면 당시의 나는 나를 믿어주지 못했다. 나를 조금만 더 믿어줬더라면 보다 현명하게 그리고 행복하게 그 시간들을 극복할 수 있었을텐데.



고뇌와 슬픔의 시간은 흐르고 흘러 5년이나 지난 2020년에 서있다. 난 어느덧 두 아이의 엄마가 되었고, 기자로서 미국에서 살고 있다. 간절하게 꿈꾸며 살다보면 꿈꾸던 것과 오차없이 똑같을 순 없어도 어느 정도 비슷한 지점에선 살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몸소 깨달았다.



대학을 졸업한 후, 특히 결혼을 한 후에는 인생의 변수들이 쏟아져 나온다. 본인 몸만 챙기면 되던 상태에서 완벽하게 타인이었던 배우자를 만나 함께 공동의 미래를 그려나가야 하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때문에 플랜A가 이뤄지지 않았을 때, 플랜B와 플랜C를 꺼낼 수 있는 여유를 장착해야 한다. 계획이 뒤바뀐다고 해서 인생 전체가 통틀어 사라져 버리는 것은 아니기에.



여전히 'OO맘'으로 불리길 선호하지 않는 이유는 이 세상에서 한 명의 개인으로서 자신의 삶을 살아나가고 싶은 소망 때문이다. 아내, 엄마가 아닌 그저 나로서 이 세상에 목소리를 내고 싶기 때문이다. 나를 지켜야지만이 내 가정도 아이도 지킬 수 있기 때문이다. 굳이 'OO맘'이라고 호명되지 않아도 이미 내가 아이들의 엄마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고, 아이들을 깊이 사랑하고 있다.


다만 보다 많은 사람들이 내 이름을 불러주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나도 그들에게 이름을 불러주고 싶다.




‘꽃’

-김춘수-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 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많은 이들이 꽃필 수 있게끔 서로 이름을 불러 주는 일이 많았으면. 우리 모두 무엇이 되고 싶기에.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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