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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ris Seok Aug 09. 2020

일기장을 들춰보며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내가 대화하는 일

나는 주기적으로 일기를 쓴다. 슬픈 날도 쓰고 기쁜 날도 쓰고 힘든 날도 쓰지만, 뭐니뭐니 해도 일기는 고민이 가득할 때 쓰는 맛이 있다. 일기를 쓰는 일은 내가 살아가는 데 있어서 스스로에게 가장 큰 위안을 주는 삶의 방식이다. 힘든 하루의 끝에 지친 마음을 일기장 위에 문장으로 나열해 다 게워내고 나면, 일기를 쓰기 이전보다 한 뼘 정도 더 가벼워진 내 마음의 무게가 느껴진다.


일기를 쓰기 시작한 건 언제부터였을까. 아마도 매일 담임선생님에게 그림 일기를 검사 받아야 했던 초등학생 때부터가 아니었나, 추측해 본다. 되돌아보니 참 신기한 일이다. 초등학생, 중학생, 고등학생에 이르기까지 늘 담임선생님은 학생들의 일기장을 검사했다. 그리고 일기 밑에 일일이 코멘트를 달아 주기도 했다. 일종의 내 일기에 대한 감상평이었던 셈이다. 나의 가장 은밀한 이야기를 매일매일 누군가 들여다 보는 일이라니. 서른이 넘어 그 때를 되돌아보니 일기장을 검사 받았던 그 시절이 참 괴이하게 느껴진다.



학생 때 의무적으로 쓰던 일기가 습관처럼 나의 일부에 베어 있었는지 스무살이 된 나 또한 이제 그 누구도 검사해주지 않는 일기장을 자주 써내려 나갔다. 월, 화, 수, 목, 금, 토, 일의 7일분의 삶을 메모 형식으로 매일 기록하는가 하면, 무제 공책에다 무작위적으로 내가 쓰고 싶은 날에만 쓰는 일기도 있었다. 타의적으로 또는 자의적으로 20년간 일기를 써오다 보니 일기를 쓰는 일은 그저 밥을 먹고, 일을 하고, 화장실을 가는 일처럼 자연스러운 일상의 일부분이 되었다.



때문에 일기에 관한 예찬을 늘어놓는 일이 어쩌면 조금 멋쩍게 느껴지기도 할테지만 나는 일기예찬을 하고 싶다. 일기의 순기능에 대해서 이야기하자면 끝이 없기 때문에 1번부터 10번까지 번호를 매겨 요목조목 설명하고 싶은 충동도 들지만, 고리타분한 순위 매김은 하지 않기로 한다. 다만 이점에 대해선 집고 넘어가고 싶다. 일기는 현실의 삶에서 수시로 잃어가는 ‘나’를 이곳으로 데리고 오는 일이라고. 






2012. 12. 18

2012년의 끝자락에서 이번 해를 붙잡아두고 싶은 심정. 반짝이고 찬란하기만 했던 스물 넷의 1년이기에 이렇게 끝나버리면 두고두고 그리워하게 될 것만 같다.


2013. 4. 28

뭐랄까. 앞으로 다가올, 내가 건너가야 할 길들이 울퉁불퉁 하다는 사실에 묘한 희열을 느꼈다고나 할까. 한 편으로는 두렵고 피곤했지만 또 다른 한 편으로는 도전의식이 스멀스멀 피어 올랐다. 내가 이뤄내야 할 그 다음 목적지가 정해졌다는 사실이 내 삶의 의욕에 불씨를 지폈다.


2014. 10. 8

잠이 오지 않는 새벽. 음악을 들으며 책을 읽는 여유가 좋지만 왠지 모르게 불안하다. 대학원 서류 제출에 대한 압박감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5년 뒤 나의 삶을 상상해본다. 잡지사 에디터, 취재다니는 기자, 방송 진행자. 이 중에 하나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내가 살아온 길이 부끄럽지 않을 수 있도록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고 생각한다. 아니, 다짐한다.


2015. 5. 15

인생의 방향성을 제대로 정해두고, 그 방향으로 흘러가야 한다는 생각. 자주 생각하지 않으면 그저 바람 부는 대로 아무 곳으로나 흘러가 버릴 것만 같아서 겁이 난다. 나만의 인생철학으로 방향의 갈피를 잡아야 한다.





일기장을 들춰보며 내 삶의 궤적을 한 발자국씩 따라가본다. 과거의 이 지난한 시기들을 통과해 지금의 내가 여기 이곳에 있구나. 시간은 무심하게 흘러버렸지만 여전히 변하지 않는 ‘나’라는 고유한 존재가 일기장 위에 고스란히 살아 움직였다. 신기하게도 일기장을 읽다 보면 그 때의 감정이 마치 그때처럼 그대로 재현될 때가 더러 있다. 그리하여 과거의 나와 지금의 내가 만나게 된다. 이를테면 과거와 현재의 자아가 한 곳에서 만나는 순간.



일기장을 들춰보며 과거의 나와 과거에 내가 살아온 인생을 다시금 되새겨 보는 일은 나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스스로 자각하게 만든다. 현실에서 조금 못나고, 모난 내가 사실 내 생각보다 훨씬 더 괜찮은 사람인 것같은 느낌이 들기도 한다. 이렇게 인생을 고뇌하며 살아온 한 인간이…생각보다 근사한 사람일지도 모른다고, 나의 삶을 제 3자의 입장에서 바라보게 된다.



나 같은 경우엔 삶이 버겁게만 느껴질 때 유독 일기장을 자주 찾는 경향이 있는데, 그래서 내 일기장엔 철학서에서나 나올 법한 고뇌와 번뇌가 70% 이상의 지분을 차지하고 있다. 삶이 즐겁고 재미날 땐 일기를 쓸 여유가 많지 않다. 일기를 적어내려 간다 해도 껍데기같은 내용으로만 가득하다. 반면 삶이 퍽퍽할 땐 일기장에 써내려 가고 싶은 내용이 무궁무진하다. 친구에게 토로하듯이 일기장에 털어 놓고야 마는 마음.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대나무 숲에 소리 지르는 이발사처럼 일기장은 내게 대나무 숲의 역할을 해준다.



힘든 이야기로 채워진 일기장을 읽는 일은 지금의 내게  위로가 되기도 한다. 지금보다 훨씬  힘들었던 과거의 내가 현재의 나에게 말을 걸어준다. ‘ 지금 생각보다 되게 괜찮은 삶을 살고 있어라고. 과거의 내가 당시의 힘든 일들을 어찌 저찌  이겨내고,  시간들을 지나 지금에 도달한 것만 봐도 결국 모든 일은 ‘지나가리라,’  진리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래서 유독 마음이 힘든   뒀던 일기들은 미래의 어려운 날을 보내고 있을 나를 위해 미리 들어두는 ‘정신 건강보험같다.



일기장을 읽는 일은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내가 대화하는 과정이며, 이 과정을 통해 나는 나를 잃지 않을 수 있다. 난 여전히 과거의 나에게 위로를 받기도 하고, 응원을 받기도 한다. 일기를 쓰는 한 멈출 수는 없을 것이다. 일기장을 들춰보는 일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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