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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ris Seok Feb 05. 2021

남편의 야근 소식은 나를 설레게 한다

혼자만의 시간, 그 설레임

새해 들어 부쩍 남편의 야근이 늘었다. 회사 직원이 한꺼번에 세명씩이나 그만두는 바람에 남편의 업무량이 기존의 3배 이상으로 많아진 까닭이다. 오전 5시에 일어나 이른 새벽 출근을 해서 밤 늦도록 일해도 '일은 줄지않고 쌓이기만 한다'는 남편의 하소연에 남편에 대한 연민의 감정이 절로 올라왔다. 불쌍한 사람. 나 역시 육아와 일을 함께 짊어지고 살아가느라 한숨 나오는 날이 많지만 남편에 비하면 별게 아니란 생각이 들어 남편이 더욱 안타깝게 느껴졌다.


그런데 연민의 감정과는 별개로 "나 오늘도 늦어" "나 오늘은 회사에서 자고갈게"라는 남편의 연락은 나를 조금은 설레게 만들기도 했다. 이런 설레임은 죄책감을 동반했지만, 그래도 어쩌랴. 이게 솔직한 내 감정인 것을.


남편의 부재는 왜 나를 설레게 하는 걸까?


그건 남편의 부재를 통해 얻을 수 있는 '혼자 노는 시간'이 귀하디 귀하기 때문이다.


평소 남편은 오후 8시쯤에야 귀가한다. 일도 많은 데다 한국으로 치자면 대전-서울 거리에 준하는 통근거리는 남편의 퇴근 시간을 늦어지게 만들었다. 오후 8시에 집에 도착해 파김치가 된 남편을 마주하면 반가운 마음과 함께 뭐라도 따뜻한 저녁밥을 먹여야 한다는 사명감에 난 분주해진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 시작된다.


남편을 챙기느라 아이들을 재울 수 없게 되고, 아이들은 오랜만에 일찍 집에 들어온 아빠가 반가워 방방 뛰어댄다. 남편에게 저녁을 차려주고, 저녁 먹는 남편 옆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설거지를 하고 아이들을 재울 준비를 하다 보면 어느새 오후 10시가 되어버린다. 흥분한 아이들은 오후 10시30분에서야 겨우 잠들고 나역시 방으로 들어와 대충 씻고 11시면 골아 떨어져 버린다. 그렇게 내 하루는 끝이 난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남편의 퇴근은 나의 자유시간을 상실케 한다.




남편이 야근하거나 회사에서 자고 오는 날이면 나의 저녁시간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전개된다.


재택근무가 오후 6시에 끝나자 마자 아이들에게 저녁을 먹이고, 씻긴 후, 잠 재우기에 돌입한다. 엄마의 노력을 알아준 걸까. 조용한 집에서 아이들은 적어도 오후 9시 이전에는 꿈나라에 간다. 아이들의 새근새근 잠든 숨소리에 난 쾌재를 부른다. '얏호! 드디어 나에게 새로운 하루가 왔다!'


아이들이 잠든 오후 9시면 나에게는 또 다른 하루가 시작된다.


늦은 시간 시작되는 하루는 정말 '나만을 위한' 시간이다. 아이들과 남편이 내 삶에 배제된 시간. 나만을 위해 쓸 수 있는 시간.


간단한 홈 트레이닝을 끝마치고 욕조에 목욕물을 받는 걸로 이 시간은 시작된다. 경건한 의식을 치루듯이 '홈트와 목욕'이 언제나 내 자유시간의 첫 루틴이다. 찌푸둥한 몸을 풀고, 약간의 땀을 흘린 뒤, 뜨끈한 물에 몸을 퐁당 담구면, 난 이 세상 그 무엇도 부럽지 않은 사람이 된다.


목욕탕 안에서 속세의 근심 걱정은 모두 떨쳐낸 채로 난 내 몸의 감각과 재미만을 추구한다. 책 또는 아이패드는 탕 안에서 좋은 친구다. 하루종일 읽고 쓰는 일을 하다보니, 요즘에는 활자에 조금 지쳤는지 탕 안에서 아이패드로 영상을 보는 일이 잦다. 유튜브에 편집돼 올라온 '웃긴 영상 모음'을 보거나 요리 영상을 본다. 최근 장항준 감독의 영상들이 너무 웃겨 계속 보는 중이다. 탕에서 장 감독이 과거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했던 영상을 보며 혼자 깔깔대다 보면 '나는 누구 여긴 어디?' 이런 감정이 절로 든다.



목욕을 끝내고 오후 11시쯤부터는 먹이를 찾아 떠나는 하이에나 마냥 또 다른 할일을 찾기 시작한다. 잠들 생각은 전혀 없다. 최근에는 남편의 야근으로 인해 '미라클모닝'에서 '미라클나잇'을 하는 사람이 되어 버렸다.



이 시간에는 무거운 책보다는 가벼운 글을 읽는다. 이를테면 <어라운드>와 같은 라이프스타일 잡지. <어라운드> 잡지는 누군가의 소소한 삶을 특별하게 그려내는 인터뷰 위주로 구성된 잡지다. 비슷한 듯 다르게 살아가는 누군가의 인생을 잠시 엿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그리고 나 역시 그들처럼 소소한 곳에서 행복을 만끽하며 살아가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바람이 커진다.


놀고 싶다는 욕구가 크게 올라오는 밤이면 넷플릭스를 켠다. 어제 밤에는 <내가 사랑했던 모든 남자들에게> 1편을 보고 흐뭇한 미소를 머금은 채 밤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첫 남자친구와의 사랑을 그리고 있는 영화를 보다보니 남편과의 연애시절이 떠올랐다. 스물넷이라는 어린 나이에 스물다섯이었던 당시의 남편을 만났다. 그 시절의 나로부터 어느새 9년이나 지나버렸다. 남편에 대한 사랑에는 변함이 없지만, 그 시절에만 느낄 수 있었던 풋풋함 설렘이 몹시나 그리웠다. 무엇보다도 책임지고 부양할 가족 구성원 없이, 우리 둘이서만 데이트를 즐길 수 있었던 그 때가 꿈처럼 멀고 아득하게, 희뿌옇게 느껴진다. 우리에게도 정녕 그런 때가 있었나?


어렸을 때의 나는 내가 언제까지나 엄마 아빠의 딸로 소녀의 역할에 머무를 줄 알았다. 엄마 아빠는 언제나 중년의 나이에 머물러 있을줄 알았고. 말하자면 엄마 아빠도 나처럼 소녀, 소년 시기가 있었다는 사실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었다. 그런데 내가 '엄마'가 되고나니, 문득 깨닫고 말았다. 엄마, 아빠가 된 후에도 우리 모두는 여전히 과거의 어느 순간에 머물러 있다는 사실을. 겉모습이 나이들고, 역할이 조금 더 부여됐을 뿐 마음 속 자아는 청춘의 언저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최근 목욕하며 읽은 책의 구절에는 이런 내용이 쓰여 있었다.



"어느 프랑스 인류학자는 말했다. 인간의 자아는 나이 들어감과 상관없이 계속해서 젊은이의 영혼을 지닌채 살아가는 비극적인 운명 속에 놓여 있다고. 언제까지라도 자신이 어리고 젊었을 때처럼 연약한 상태로, 애정을 갈구하는 위치에 서 있다고 착각하면서." (p.165, 소설보다 겨울 2020)


그렇다. 내 자아는 젊은이의 영혼을 지니고 있다. 아직 30대이니 사회적으로 규정하는 '젊은이'에 속할테지만, 나는 20대의 내 자아의 옷자락을 놓지 못했다. 20대의 나를 꾹 부여잡고, 육아를 하며 엄마라는 정체성을 살아가자니 현실에서 마음이 힘들 때가 많다. 아직 자유롭고 싶고, 엄마 아빠의 자식 역할만 하고 싶은 내게 한 가정을 꾸려나가야 하는 입장이 조금 버겁게 다가올 때가 많다.


그래도 오후 9시부터 다음날 오전 2시까지. 5시간은 완벽하게 젊은 나로 되돌아   있다. 현실세계의 역할극에서 벗어나 그저  자아를 쓰다듬을  있는  다섯 시간이 참으로 값지다.


이러니 남편의 야근 소식이 설렐수 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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