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 챙기는 현지인 사이 복 잃어버린 나
해외 파견 전 교육을 받을 당시, 이미 아프리카 국가에서 생활해 본 동기들은 하나같이 비슷한 말을 했다.
"동아프리카로 가서 다행이네요. 사람들이 순수하거든요."
아프리카 국가 경험이 없는데 조언을 듣고 한 숨 돌리는 표정을 하자마자 한 마디 덧붙였다.
"근데... 같이 일하면 또 모르겠네요. 일처리가 느린 곳이기도 하고, 한국이 워낙 빠르잖아요?"
그때의 나는 그 말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프랑스 유학시절 여름 휴가 기간 관공서 업무가 멈추는 바람에 비자 비자 발급이 지연된 적도 있었고, 요르단 근무 당시에는 협업하는 기관에서 서류 공유가 늦어져 보고서 필수 내용 작성도 지연되어 상사에게 변명 아닌 변명도 늘어놓아야 했던 경험도 있다.
탄자니아라고 해도 뭐가 그렇게 다르겠나. 사람 사는 곳 다 똑같지. 그때는 그렇게 생각했다.
폴레폴레의 나라 탄자니아
탄자니아에 도착한 뒤, 안전 교육을 받고 현지인 직원에게 현지 문화 교육을 받았다. 나보다 업무를 더 오래 맡아온 현지 직원의 업무 소개 및 간단한 현지 문화 소개 시간이었다. 약 40분 정도의 교육이었는데 지금까지도 기억나는 문장이 있다. 뒤에 소개할 이 문장은 탄자니아에서 일하며 지내기로 했다면 알아두는 편이 좋다.
Haraka haraka haina baraka (하라카 하라카 하이나 바라카)
스와힐리어 속담으로 한국식으로 풀어본다면 서두르면 복이 달아난다는 뜻이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현지문화를 설명하는 표현이 하나 더 있다. 바로 pole pole(폴레폴레). Pole pole는 한국어로 '천천히 천천히'를 뜻한다. 국가번호도 +82이면서 빨리빨리의 나라 대한민국에서 온 내가 저 표현을 처음 들었을 때의 심정이란. 현지직원은 단 두 문장으로 여기는 천천히, 여유롭게 사는 나라라는 것을 강조해준 셈이었다. 이어지는 교육도 비슷한 내용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저 표현은 문화 소개용이자 조금 더 과장하고 강조해서 설명한 것이라 생각했다. 이제 막 탄자니아에 도착했지만 빨리빨리에 익숙한 이 한국인 신규 직원들한테 약간의 충격을 주고, 마음의 준비를 하라는 의미 정도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그 교육이 단순한 교육 문장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일주일도 채 지나지 않아 알게 됐다.
탄자니아에서 믿으면 안 되는 말 I'm coming/Nakuja (저 가고 있어요)
주거 계약 마무리를 위해 매니저와 4시 30분에 만나기로 한 날이었다. 바자지도 택시도 잡히지 않아 10분 정도 늦을 것 같아 미리 문자를 보냈더니, 괜찮으니 천천히 오라는 답이 왔다. 그래도 첫 약속부터 늦을 수 없다는 생각에 약속 장소에서 내리자마자 부리나케 뛰어 사무소로 향했다.
하지만 사무실 문은 굳게 잠겨있었고 만나기로 한 매니저는 보이지 않았다. 오늘 중 계약서 서명을 해야 입주 날짜가 확정 되는 상황이라 마음이 급해져 전화를 걸었더니 돌아오는 답은
"I'm coming~(가고 있어요.)"
다른 직원의 안내를 받아 로비 소파에 앉아서 기다렸다. 그사이 표정이 굳어 졌는지 한 직원이 나를 보고 웃으며 "She's coming (오고 있어요.)"하고 눈을 찡긋하며 지나갔다. 그렇게 15분 넘게 로비에서 기다린 뒤에야 매니저를 만나 계약을 마무리 할 수 있었다.
이 때까지도 몰랐다. 탄자니아에 "가고 있어요."라는 말이 얼마나 위험한 말인지.
1년 동안 참 많은 일이 있었는데, 그 때마다 나만 '서두르는 한국인'이 되었다. 집의 가전제품(세탁기, 냉장고, 에어컨, 전자레인지 등)이 고장 났을 때, 창문 잠금장치가 고장났을 때, 벌레가 나와 방역을 부탁했을 때 여러 사람이 왔지만 체감상 90% 이상이 약속 시간보다 늦었다. 아니, 나타나면 다행이다. 월요일에 오기로 한 사람이 일주일이 지난 다음 주 월요일에 온 적도 있고, 어떤 사람은 잠수를 타고 아예 나타나지 않기도 했다.
오전 9시에 창문 잠금장치를 수리하기로 한 직원이 오지 않아 매니저에게 연락했다. 직원과 통화를 했는데 엘리베이터를 타고 우리 집에 오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3시간 뒤에 나타났다. 1층에서 우리집까지 오는 길에 블랙홀이라도 있는 것일까. 그래도 방문은 해줘서 고맙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탄자니아에서 편하게 일하는 방법 중 하나, 포기하기
업무와 무관한 일상 생활에서만 이랬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업무를 할 때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업무를 오래 해 온 현지 직원에게 한국에서 방문하는 사람들을 위해 예산 내 숙소 예약을 부탁하고, 인보이스를 전달해달라고 요청한 적이 있다. 방문일자가 다가와서 한 번 확인 차 물어보았다.
"예약은 마무리 되었죠? 금액은 이전과 같죠? 현금 언제 드릴까요?"
이상하리만치 빠르게 답이 왔다.
"깜박하고 숙소에 못 갔어요. 하지만 그 숙소 예약 가능할거예요. 점심 시간 지나서 가볼게요."
혹시 남는 방이 없는 것은 아닐지, 숙박비가 오르지는 않았을지, 예산 내 지불 가능할지 걱정하는 나와 달리 현지직원은 평온했다. 내 마음은 강풍 부는 날 바다 위 유람선같은데 현지 직원들은 바람 한 점 불지 않는 바다 같았다.
현지직원 두 명과 출장을 같이 갔던 날도 잊을 수 없다. 새벽 비행기였는데, 그날따라 비가 쏟아졌다. 탄자니아의 경우 배수 시설이 잘 갖추어지지 않아 약간의 비에도 웅덩이가 쉽게 생긴다. 소나기가 내려 도로 상황이 빠르게 안 좋아질 듯했다.
국내 출장이라 여유롭게 1시간 전 공항에 도착하면 되지만, 현지에서 발생할 수 있는 모든 변수를 고려하여 딱 1시간 이상 남기고 도착했다. 체크인도 마쳤고, 기내 수하물도 문제 없었다. 탑승구로 이동해야 하는데 직원 한 명이 나타나지 않았다. 전화를 해도 받지 않았고, 문자를 보내도 확인하지 않았다. 제 시간에 도착 가능할지, 체크인은 가능할까 걱정하던 중 출발 25분 전 도착한 그는 말했다.
"비가 내려서 길이 막혔어. 그리고 국내선은 30분 전에만 도착 하면 돼"
비가 갑자기 내린 것도 아니었고, 이미 30분도 채 남지 않은 상황이었지만 그는 여전히 여유로웠다. 오히려 탑승 수속을 잘 마치지 못할까 걱정하는 나를 달랬다.
"여기는 탄자니아야."
그의 침착함 덕분에 긴장은 풀렸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이유도 모른 채 출발이 지연되어 출장은 잘 다녀왔다.
문화를 수용해보려 했지만 성공하지 못한 빨리빨리인간
탄자니아에서 10회 넘게 비행기를 탔지만 정시 출발한 경우는 손에 꼽을 수 있다. 중식당이나 인도식당이 아닌 이상, 식당에서 "음식 곧 나와요"는 음식은 보통 30분이 지나서야 나왔다. 집에 문제가 생겨 전문가를 불렀을 때도 크게 다르진 않다. 오히려 더하면 더하지. 약속한 시간에, 아니 30분 이내 오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적어도 1시간, 길면 일주일이 지나야 모습을 드러내고, 문제 해결은 음... 이런 일을 반복적으로 겪으며 화내지 않게 되길 바랐다. 하지만 끝내 그러지 못했다.
남의 나라에 와서 내 속도대로 일을 할 수는 없다. 그래서 나의 정신건강을 지키기 위해 현지 문화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려고 부단히 노력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 수록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회사에 소속되어 일하고, 일정에 맞춰 책임감을 갖고 업무를 처리해야 하는 한, 이곳의 문화를 온전히 수용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 현지인의 속도를 이해할 수는 있지만 그들의 속도에 나를 맞추는 것은 포기하는 편이 더 현실에 맞았다. 애초에 나는 이들과 다른 시간을 사는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고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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