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겁지만 건조해서 좋습니다
요르단의 여름은 그냥 더운 것을 넘어서 후덥다. 출근길은 괜찮지만 퇴근길은 아스팔트가 달궈질 대로 달궈져서 5분 거리를 걸어가도 숨이 턱턱 막힌다. 7월에는 처음 하는 일에 적응하느라 그런지 덥다는 것 자체를 못 느꼈다. 몸은 더위를 느끼고 신호를 보내지만 머리가 기온을 받아들이지 못해서 힘들지 않았다. 하루라도 빨리 나은 보고서를 쓰고 상급자의 명령 같은 요청을 잘 이해하고 싶었을 뿐. 회사 근처 집 구하는 일까지 겹쳐서 더더욱 더위를 느낄 틈이 없었다. 퇴근할 때 조금 힘들긴 했지만 기온이 조금 떨어진 해진 뒤에 외출을 감행하여 괜찮았다.
8월은 출근 후 2주 정도 지났다고 2% 정도 적응이 되었는지 더위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요르단 관련 보고서 작성, 업무 관련 영어 메일 주고받고 회의 스케줄 잡는 일은 여전히 떨렸지만 주변에 좋은 분들 덕에 빠르게 적응할 수 있었다.
요르단의 집은 시원할 때 춥고, 더울 때는 덥다. 거실 창이 커서 그런지 집 내부는 빨리 뜨거워졌다. 한국에서는 보기도 힘들었던 열쇠를 무려 세 개나 사용해서 집으로 들어가면 50도 사우나 입구에 들어간 것처럼 열기가 훅 다가왔다. 혼자 사는 집에서 느껴지는 이 따스함. 물론 좋게 말해서 따스함이다. 에어컨 바람을 선호하지 않아 한국의 고온 다습한 날씨에서도 거의 켜지 않는 사람이 나다. 그런 내가 어느 순간 집에 들어가자마자 문 옆에 설치된 에어컨용 리모컨을 집어 에어컨을 켜기 시작했다. 습도는 낮아서 짜증지수는 덜했지만 더워서 힘든 건 여전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전기요금 고지서를 받았다. 별로 쓴 것도 없는데 22.8JD(약 4만 5천 원). 내년에 이 더위를 한 번 더 겪을 텐데 익숙해질 것인가, 돈을 지불하고서 시원하게 지낼 것인가. 요르단 물가 대비 귀여운 내 월급을 보며 스페인 사람처럼 자연 바람을 느끼며 낮잠(시에스타 Siesta)*을 자면서 더위를 이겨내는 방법을 택했다.
낮잠을 자니 확실히 더위는 덜 느껴졌다. 자면서 끙끙대긴 했지만 움직이는 것보단 낫다. 대신 저녁에 잠이 잘 안 오고, 오후에 사용할 수 있는 시간이 애매해지는 단점이 발생했다. 퇴근 후 에어컨이 있는 곳을 찾아가야겠다 싶었다. 하루는 퇴근 후 아이스크림을 먹겠다는 대단한 의지로 길을 나섰다. 내가 거주하는 곳 주변에는 작은 슈퍼, 이탈리안 식당뿐이라 건너편 동네로 갔다. 8차선 정도 되는 넓은 도로를 건너는데 중앙선이 보이지 않았다. 페인트도 더위에 사라져 버린 듯하다. 어차피 녹아서 사라질 거 다시 칠할 예정도 없는 듯했다. 머리 위는 태양열, 아래는 잘 익은 아스팔트에서 올라오는 열기로 익어갔다. 의지가 꺾일 뻔했지만 바람 한 점 불지 않는 거리를 짐을 지고 가는 낙타처럼 묵묵히 걸어 아이스크림 가게에 도착했다. 집에서 가장 가까운 아이스크림 매장이라 간 건데 부자 동네라 그런가 메뉴판에 보이는 숫자가 '이게 맞나' 싶을 정도였다. 그냥 나갈까 밖을 보는데 아지랑이가 보이는 듯했다. 결국 4.5JD(약 9천 원) 짜리 아이스크림을 주문했다. 질소 아이스크림이라 그런가 부드러웠고, 초코맛도 진해서 맛은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달콤한 아이스크림을 입에 넣으며 '이렇게 매일 나와서 돈 쓰는 게 전기세보다 많이 나오겠다'는 생각을 했다.
더위에 정신이 녹아내려 잠시 잊었던 이 동네 물가가 아이스크림 하나에 살아났다. 내 공간을 휴양지로 만드는 것으로 계획을 변경했다. 시에스타도 끝이다. 동네 슈퍼에서 8JD(약 16,000원) 짜리 벤앤제리스(Ben&Jerry's) 파인트 아이스크림을 비롯하여 납작 복숭아, 망고, 청포도 등을 잔뜩 사서 냉장고에 넣어뒀다. 밖에서 매일 만 원씩 쓰느니 전기세를 10만 원 내겠다며 에어컨도 켰다. 마음 같아서는 22도까지 낮추고 싶었지만 24도로 강하게 작동하도록 해뒀다. 처음에는 전기세가 걱정됐지만 체감 기온이 45도를 넘으니 이제 내 몸이 걱정됐다.
요르단의 여름은 6~8월, 그럼 8월부터 더위가 한풀 꺾여야 하는 거 아닌가. 8월 말에도 40도가 넘는 날이 잦았다. 여름에도 뜨거운 차를 고집하고 아이스크림도 안 즐기고 에이컨도 싫어하던 내가 요르단에서 얼음물을 마시는가 하면 과일에도 얼음을 넣고, 비싼 아이스크림도 사 먹고 에어컨을 켜놓고 지내고 있다니. 회사일과 요르단 생활에 적응하고, 이사도 하고하니 8월이 끝났다. 매일 에어컨을 켜고 지낸 8월의 전기요금은? 24.2JD(약 48,000원). 3,000원 정도 더 나왔다. 뭐야. 심지어 9월까지도 더워서 에어컨을 계속 틀었는데 어찌 전기요금은 첫 달 보다 적게 나왔다. 알 수 없는 요르단 전기요금.**
*스페인의 전통 낮잠시간 시에스타(Siesta). 오후 2시부터 5시까지 낮 잠을 자고 다시 퇴근하여 저녁 늦게 퇴근하는 관습이 있다. 낮잠을 자면 수면의 질이 나빠지고 가족들과 보내는 저녁 시간이 줄어든다는 등의 이유로 2016년도 폐지 이야기가 나왔으나 여전히 유지되고 있는 듯하다.
**요르단 현지인은 정부 보조금을 받아 전기세 감면이 되는 듯하다. 한국인들 대부분 20~50JD를 지불했는데 현지인 친구들은 대가족임에도 불구하고 더 낮은 전기세를 지불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