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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소윤 Jun 26. 2023

처음 보는 사람에게 성희롱을 당했다

정신적 피해에 대한 손해 보상 소송의 전말 (2)


나는 그 사람이 좋게 말로 해서 내 심정을 이해하고 진심으로 사과한다면 진심으로 용서해주려고 했다. 내가 그 전날 느낀 호감은 진짜였기 때문이다. 이걸 빌미로 아주 맛있는 와인이나 사달라 그럴까, 하는 생각까지 했다. 그러니까 나는 그 사람을 또 만나서 데이트를 할 생각까지도 하고 있었다.


그래서 구구절절 문자로 내가 원치 않는 성적 대상화를 당하고 얼마나 무력하고 비참한 기분이었는지 설명하고 당신이 평소에 여성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하고 있기에 그런 언행을 할 수 있는지 따져 물었다. 사과를 받고 용서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는 문자 세 마디만에 갑자기 내게 위로금을 제안했다. 나에게 충분한 사과를 할 자신이 없으니 돈으로 때우겠다는 걸로 보였다. 여기서 나는 2차로 화가 났다. 최종적으로 돈을 받을 순 있겠으나 내가 진짜 알고 싶었던 건 그가 왜 그랬는지, 진짜 나에게 미안하긴 한 건지, 그런 그의 진심이었다. 쉽게 위로금을 제시하는 그는 마치 나를 꽃뱀으로 여기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를 연결해 준 사람이 페이스북 친구였기 때문에 페이스북에 자세한 상황을 올리긴 좀 그랬다. 그 여자분이 자신의 탓이라고 자책하지 않았으면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참 후에 친한 언니가 그건 그녀의 탓이 맞다고 내게 얘길 해줬다. 결정적인 잘못은 그가 했지만 그녀 또한 처신을 잘못한 것이라고. 그날 이후 그녀를 대하는 것이 조금 껄끄러워진 것도 사실이었다. 


아무튼 간단히 상황과 그가 돈을 제시하는 문자를 페이스북에 올리고 사람들에게 조언을 구했다. 직장 내에서의 성희롱 외 성희롱은 형사 고소 대상이 아니라고 했다. 마침 다음 날 아는 변호사 님과 저녁을 함께 하기로 한 날이어서 조언을 구했고 저렴한 비용으로 그분이 도와주기로 하셔서 정식으로 정신적 피해에 대한 손해배상 청구를 진행하기로 했다. 


지난 9월 있었던 일이다. 그 일을 여태껏 부모님께 말하지 못한 건 ‘그러게 왜 그런 술자리에 나갔냐’, ’평소에 옷을 좀 조신하게 입어라‘ 등의 잔소리를 듣고 싶지 않아서였다. 우리나라는 여태껏 성범죄에 있어서 가해자에게 관대하고 피해자들의 행동 거지를 탓하는 경향이 있다. 만취한 사람들 사이에 둘러싸인 것, 처음 보는 남자에게 ’떡 치고 싶다‘는 말을 듣는 것 모두 내 잘못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나는 내 탓이라고 지적당할까 봐 두려웠다. 무엇보다 그런 말을 사랑하는 부모님께 들을까 봐 너무 두려웠다.


이번에 항소심 관련한 서류를 받고 사건을 부모님께 털어놨을 때 어머니가 제일 먼저 한 말은 왜 일을 그렇게까지 크게 만드냐는 거였다. 친구도 그런 경험이 있다고 했다. 고소를 하려고 했는데 상대방이 오히려 보복을 할까 봐 그냥 취하했다고. 엄마도 비슷한 말이었다. 소문이라도 나면 어쩌니, 이렇게까지 길게 일을 끌 것 까지야, 그냥 넘어가지 그랬니.


그냥 넘어갈 수 없었던 이유는 그가 너무 쉽게 위로금을 제안했기 때문이었다. 그가 제시하는 위로금을 내 손으로 받게 되면 내가 진짜 꽃뱀이 되어버릴 것만 같았다. 법원에서 진짜 내가 받은 건 성희롱이라고 인정하고 그에 합당한 대가를 정해주길 바랐다. 어차피 그에게 진심 어린 사과를 받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기 때문에 모든 사과와 죗값은 공적인 권력 기관을 거치길 바랐다. 


쉬운 결정은 아니었다. 법정분쟁은 처음이었지만 소송이 최소 몇 달의 시간이 걸릴 거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그 시간 내내 나는 어떤 결과가 나올지 전전긍긍해야 할 것이었다. 사건을 잊을 수도 없고 흘려보낼 수도 없는 것이다. 그가 어떻게 나올지도 두려웠다. 수 분 거리 같은 동네에서 일하는 그가 내게 어떻게 해코지를 할 수는 없을까 온갖 경우의 수를 생각했다. 일이 더 커져서 이 사건이 세상에 밝혀졌을 때 사람들이 나를 탓하진 않을까, 한 회사의 대표라는 사람이지만 그가 술자리에서 남자가 그럴 수도 있지 뭐~ 하는 말로 아무 타격도 받지 않는 건 아닐까, 그런 생각도 했다. 


내게 조언을 해주고 도움을 주기로 한 변호사 님이 제시한 비용은 내가 감당할 만한 금액이었다는 것도 내 결정에 큰 영향을 주었다. 내가 하고자 하는 것이 거대한 정의실현이라기보다는 내가 당한 성희롱의 피해를 정당하게 받아내는 것이었기 때문에 변호사 비용이 너무 비쌌다면 진행할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나중에 친구에게 들었지만 정말 보통의 변호사 비용에 비해서 저렴한 금액이라고 했다. 또 변호사님이 이미 몇 년 간 알고 지낸 분이라는 것도 큰 위안이 되었다. 궁금한 것은 편하게 물어보고 빠른 답변을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8개월 만에 판결이 나왔고 이기긴 했지만 우리가 제시한 피해보상 금액보다 현저히 적은 금액이 나왔다. 변호사님이 항소를 하겠냐고 물었고 나는 일주일 정도 고민을 했다. 이 사건을 더 이상  질질 끌 자신이 있는가 내 자신에게 물었다. 


그런데 신기한 건 재판을 진행하고, 거기서 가해자가 잘못을 시인하고, 또 우리가 이겼다는 결과가 나온 것만으로도 나는 내면의 뭔가가 치유받는 기분이 들었다. 더 진행해도 괜찮을 것 같다는 자신감이 생겨있었다. 변호사님의 일은 좀 더 많아지겠지만 여유로울 때 맛있는 걸로 갚으면 돼지.


항소의 결과가 어찌 될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이렇게 변호사 님이 나를 도와주고, 친구들이 기꺼이 탄원서를 써주고, 또 정식 재판에서 손해배상 금액을 제시받고 하는 이 과정 자체가 나에게 위안과 격려가 된다. 이 사건과 내 기분에 대해서 자세히 쓰고 있는 이 일 자체가 내게 삶의 중요한 전환점이 될 것 같다. 


살면서 성범죄의 대상이 한 번도 되어보지 않은 여성은 없을 것이다. 나만 해도 이것이 처음이 아니다. 너무 어려서(초등학교 때 성추행을 당했다), 혹은 직장 상사여서, 그쪽이 부정하면 증명할 길이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참고 넘어갔던 모든 일들은 죽을 때까지 절대 잊지 못할 것이다. 아직 다 마무리되진 않았지만 이번 사건으로 나는 앞으로 성범죄 사건에서 내가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조금은 더 잘 알게 되었다. 중요한 건 피해자를 탓하면서 2차 가해를 하지 않는 것이다. 걱정되는 마음에 거길 가지 말지, 앞으로 더 조심하라는 뜻에서 그렇게 입지 말지, 하는 말은 피해자의 입을 닫고 아예 꿰매어 버린다. 


페미니즘은 여성과 남성의 권리가 평등해지길 바라는 것이다. 성범죄의 90%가 남성에 의해 저질러지는 사회에서 페미니즘을 말하면 극단적이다 욕먹는 게 우습다. 최소한 우리 여성들끼리라도 연대하고 위로하고 손 잡아 줄 준비가 되어 있다는 걸 많은 여성들이 알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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