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빠랑 셋이 살기
집에서 제일 가까운 지하철 역에서 집까지 걸어서는 25분 정도 걸린다. 나는 보통 거기서 버스를 갈아타고 세 정류장 더 와서 집 앞에 내린다. 근데 언젠가부터 엄마가 지하철 역에 내리고선 자꾸 걸어서 집에 왔다. 엄마는 늘 운동삼아 일부러 걷는 거라고 했지만 모임이 끝나고 밤늦게 혼자 걷는 길이 좋을 리가 없을 텐데, 이상했다. 한 번은 내가 집 근처에서 술을 한 잔 하고 있다가 엄마가 지하철을 내려 걸어오는 시간에 맞춰서 중간에서 만난 적이 있다. 엄마는 운동하는 거라면서 웬일인지 엄청 좋아하셨다.
”딸이 내를 데리러 다 오고~!! 엄마는 너무 좋아~“
약간 술에 취해 이미 기분이 좋아진 엄마는 내 손을 꼭 붙잡고 걸었다. 이미 15여분을 걸어온 엄마는 역시나 조금 피곤해했다. 엄마 손을 꼭 잡고 나는 생각했다. 엄마가 혹시 어느 버스를 타야 하는지 헷갈려서 걸어오는 건 아닐까. 지하철 역에서 타는 버스는 반은 우리 집 방향으로, 반은 오른쪽으로 꺾어서 간다. 나도 버스 몇 번이 우리 집 방향인지 헷갈려서 매번 네이버 지도 앱을 켜서 확인하는데, 엄마가 버스 노선을 외울 리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원체 길눈이 밝은 부산 토박이 아빠는 걱정할 게 없었지만 엄마는 길눈도 어두웠다. 하지만 본인이 구하지 않는 도움을 내가 미리 내밀기도 역시 좀 그래서 별말 없이 넘어가고 말았다.
그리고 마침 며칠 전 셋이 다 같이 지하철을 타고 버스를 갈아 탈 일이 있었다. 내가 네이버 앱으로 버스 노선을 확인하고 제일 먼저 오는 버스를 아빠와 함께 찾았다. 버스가 오는 동안 나는 엄마 옆에 슬쩍 가서 혹시 버스 노선이 헷갈려서 그동안 걸어왔느냐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엄마가 쑥스럽게 웃으며 반쯤 그렇다고 했다. 나는 엄마 손을 꼭 잡고 반복해서 말했다.
“엄마, 나도 몇 번 타야 되는지 잘 모른다. 탈 때마다 어플 켜서 찾아본다. 엄마는 잘 모르겠으면 내한테 카톡으로 노선 물어봐라. 내가 그때마다 몇 번인지 보내줄게.”
버스가 4분 남은 것도 길게 느껴져서 발을 동동 구르다 보면 스마트폰이 없던 시절에 광역 버스는 어떻게 타고 다녔나 싶은 순간이 있다. 그때는 그냥 무작정 15분이고 30분이고 하염없이 버스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아직 스마트폰이 익숙하지 않은 엄마에게 세상은 아직 15년 전과 비슷할 것이다. 이사 온 지 5년이 넘은 집이 지하철 역과 멀어서 불편함을 겪는 엄마가 안쓰럽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했다.
이 집을 결정한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안방을 제외한 작은 방, 즉 내 방의 크기가 제일 넓었기 때문이다. 나와 함께 살 집을 고르느라 엄마 아빠는 교통편도 주변 편의 시설도 별로 좋지 않은 이 아파트로 이사를 왔다. 세대수가 작은 아파트라 근처에 편의 시설이라고는 허름한 슈퍼마켓 하나뿐이었다. 그나마 최근에 상가 건물이 하나 생겨서 편의점이 생겼다. 신선한 식재료를 살 마트나 시장도, 옷을 맡길 세탁소도 차가 없으면 갈 수가 없었다.
나는 곧바로 아빠 휴대폰에 쿠팡을 깔았다. 자주 사는 우유와 계란, 고기 등을 고르고 장바구니에 담고 결제하는 것까지 몇 번이고 연습시켰다. 디지털 기기와 시스템에 대한 친숙도는 아빠가 훨씬 높았다. 아빠는 이미 기차표도 어플로 예매할 줄 알았고, ‘여기 어때’에 아이디도 있었으며, 심지어 웹소설도 즐겨 읽었다. 자꾸 집에서까지 휴대폰으로 웹소설을 읽는 아빠의 시력 보호를 위해 올해 봄, 나한테도 없는 이북 리더기를 사드렸더니 집에서는 아예 손에서 놓질 않는 지경이 되었다. 아무튼 아빠는 별 걱정을 할 게 없었다. 가끔 새로고침 신공으로 매진되었던 기차표를 원하는 시간대로 끊어주면 역시 딸은 대단하다며 칭찬을 받는 정도였다.
나는 세상이 변할수록 엄마가 걱정인데, 그중 하나는 갈수록 늘어나는 키오스크 때문이다. 버스를 타고 오는 게 어려워서 그냥 걸어오셨던 엄마가 그 길에서 느꼈을 무력감과 피곤함이 나는 속상했다. 마찬가지로 어느 식당에선가 키오스크가 어려워서 엄마가 느낄 무안함과 곤란함이 걱정이 됐다. 지금까지 엄마가 갔던 식당에서는 키오스크가 어렵다고 하면 직원이 친절하게 직접 주문을 받아줬다고 했다. 하지만 무인 시스템이 점점 늘어나면 그것도 곤란해질 수 있다. 아직은 돋보기를 매일 들고 다니진 않는 엄마가 키오스크의 메뉴도 잘 못 알아보고 당황해할 모습이 눈에 선했다.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그저 나도 처음 보는 가게에서 키오스크를 만나면 메뉴를 한참 봐야 하고, 결제하는 방법도 헤맨다는 공감이었다. 그리고 가능한 한 엄마도 키오스크를 만나면 한 번씩 만져보고 주문도 해보라는 격려뿐이었다. 엄마가 좋아하는 샷추가한 카푸치노라는 메뉴를 알려주는 것과는 너무 달랐다. 키오스크 시스템이 모두 똑같은 건 아니기 때문에 어떤 단어나 메뉴 같은 팁을 알려줄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디지털 소외가 화두가 되면서 키오스크 쓰기를 가르쳐주는 문화 센터 프로그램이 있다는 뉴스를 봤다. 누군가를 소외하면서까지 발전하는 기술은 과연 좋은 것인가, 하는 근본적이고 본질적인 의문은 그 소외 대상이 바로 내가 사랑하는 엄마라는 점에서 의미가 없었다. 누군가에겐 꼭 필요할 어떤 기술들은 오히려 나의 가족을 상처 입힐 수도 있다는 생각에 새삼 마음이 무겁다. 고령화 인구가 늘어나는 한국 사회에서 디지털 자동화는 반드시 다양한 세대를 함께 안고 가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