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이미 바뀌었다는 말로 겁을 주는 수밖에
나는 편견으로 가득한 인간이다. 아무리 인종이나 피부색이 범죄율과 상관없다는 지표를 눈으로 보아도, 흑인들의 눈빛이 반짝이는 뉴욕 밤거리,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는 외국인 노동자들이 가득한 대림역 새벽 골목길은 다시는 가고 싶지 않다. 이태원 어두운 골목길에서 미니스커트를 입고 화장을 짙게 한 덩치 큰 여자분들을 마주치는 건 또 얼마나 싫고 무서운지. 호감 가던 남자가 아무나 가는 지방대를 나온 것을 알고 실망하기도 했고, 뚱뚱한 사람을 보면 자기관리를 못한 것만 같기도 해서 내가 효과를 봤던 다이어트 방법을 알려주고 싶다. 2차선에서 두 차선을 휘 가로질러 유턴하는 차나 위험하게 무턱대고 끼어들기하는 차들을 보면 다 김여사처럼 보이기도 한다.
사회적 동물인 인간이 어느 정도 이상의 편견을 가지면서 성장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미국에 흑인 대통령이 탄생한 것과는 별개로 나에게 길거리에서 추파를 날리는 뉴요커 중 대부분은 흑인이었고, 뉴스에서는 외국인 노동자들의 잔인한 범죄가 심심찮게 보도되고, 실제로 내가 마주친 거리의 마구잡이 운전자들은 남자보단 여자들이 많았다.
편견을 가지는 건 어쩔 수 없다 치자, 하지만 그것을 표현하는 것은 아주 별개의 일이다.
이태원 밤거리에서 마주치는 성소수자들이 낯설고 두려울 수 있다. 하지만 성소수자들에게 반대한다는 것은, 내 편견을 혐오로 드러내는 건 잘못되었다. 피부색과 그 인간의 존엄 자체는 아무 상관이 없다. 모든 인간은 자유로워야 하고, 평등하게 대우받아야 한다. 그것이 인권이다. 겉모습이나 학벌을 가지고 사람을 섣불리 판단하는 건 어리석은 짓이다. 인간의 내면의 반짝임은 그렇게 쉽게 드러나는 것이 아니다. 내 마음속의 순간적인 판단이 잘못된 편견에서 비롯된 것인지, 실제 사실에 근거하더라도, 표현하는 것이 합당한 지 일일이 심사숙고하여야 한다.
몇 달 전, 누군가가 식당에서 옆 테이블의 대화를 옮겨주었는데, 머릿속에 불이 들어오는 듯했다. 나이 든 중년 남성이 요즘은 시대가 바뀌어서 이런 건 남자들이 놓아야 한다며, 수저 세팅을 직접 하더란다. 여자와 남자가 할 일이 정해져 있다 믿고, 대선 후보의 강간 모의가 추억팔이 정도 되는 어르신이, 그런 어르신이 그렇게 성장하신 과정은 어쩔 수 없다. 그래서 그들을 모두 이해시킬 수는 없다. 한두 번 고개를 끄덕끄덕하더라도 그래도 역시 아이는 여자가 키워야지, 하실 게다.
이제는 시대가 바뀌어서, 이런 말 하면 안 됩니다, 하고 주입식 교육을 시킬 수밖에 없다. 그래서 우리는 떠들어야 한다. 그래서 페미니스트들의 과격한 논쟁과 어휘를 존중한다. 그렇게 한 사람 한 사람, 더러워서, 라며 말조심을 하면서, 아주 조금씩 이 세상은 변해간다. 세상이 이미 바뀌었다는 말로 겁을 주는 수밖에, 이 세상을 바꿀 수 있는 방법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