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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자리 인간

나라는 사람

by 이르마봄

참 오묘한 단어의 세계. ‘최고’, 혹은 ‘제일’이란 의미의 ‘가장’에, 위치를 뜻하는 ‘자리’가 붙으면 당연히 ‘최고의 자리’가 되어야 마땅한데, 두 단어의 만남으로 ‘가장’의 위상은 한없이 추락한다. 가장자리의 사전적 의미는 ‘둘레나 끝에 해당하는 자리’이다. 중심에서 끝으로 단번에 밀려나고 만 것이다. 잘못된 만남인 건가.


나는 삼 남매 중 가운데다. 가운데에 있으니 응당 중심이라 생각할 법한데, 나의 위치는 역시나 가장자리다. 1남 2녀의 둘째 딸. 가운데에 있음이 아닌 가운데에 ‘껴있음’이다. 남동생을 둔 둘째 딸인 나의 포지션은 짐작하는 그대로다. 아들을 낳기 위해 덤으로 하나 더 낳은 딸이 나인 것이다. 내가 1979년생, 1973년 우리나라 산아제한 표어는 ‘딸, 아들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였다. 그러니 나의 존재는 표어를 정면 반박하고 있는 셈이다.


세 살 아래의 남동생이 까불 때마다 “야, 너는 내가 아들로 먼저 태어났으면 이 세상에 나오지도 못했다.”라고 기를 죽여놓을라치면, 요 쬐그만 게 “누나, 내가 먼저 태어났으면 누나야말로 이 세상 빛을 못 봤다.” 하는데 약이 올라서 발을 동동 굴렀다. 화가 나지만 어쩐지 나도 그랬을 거 같아서, 나중에 나와준 동생에게 은근 고마운 마음이 들기도 했다.

남동생이 이렇게 오만방자할 수 있었던 이유가 또 있다. ‘혼자 사는 할머니’ 때문이다. 이것은 할머니의 상태를 지칭하는 말이 아닌, 그 할머니의 이름, 명사이다. 먼 친척이었는지 아무튼 우리 집과는 가깝게 지내는 분이었다. 할머니는 그 당시의 여느 할머니답게 철저한 남아선호사상이 있었고, 언니와 나는 할머니 앞에서 투명인간이고, 오로지 인간으로 빛나는 건 남동생뿐이었다. 존재 자체가 감탄이 되는 삶은 과연 저런 것이구나. 자주 드나드는 혼자 사는 할머니의 총애를 받으며 토실토실한 남동생의 기세는 더욱 등등해졌고 나는 그럴 때마다 몰래 쥐어박고는 울려고 하면 더 무서운 얼굴로 노려봐서 못 울게 했다. 이런 식으로 나는 나의 ‘존재 없음’을 집에서부터 학습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딸이라고 또 같은 것은 아니었다. 나와 다르게 언니는 집안의 첫 손주, 장녀라는 타이틀이 있어서 승질이 대단했다. 엄마 아빠가 먹고살 길을 찾으러 가평에서 원주로 올 때 할머니가 너무 허전해 못 살겠다 해서 언니를 할머니 손에 맡기고 어린 나만 부모님과 이사를 했다. 돌아가실 때까지 여자로 곱게 다니시던 할머니는 언니에게 주렁주렁 목걸이며 머리 방울, 마루 인형까지 사서 안겨주며 공주 대접을 해가며 키웠다. 언니는 학교 가기 전 일곱 살까지 유난한 조부모의 사랑을 받으며 시골 마을 어딜 가도 눈에 띄는 ‘가장’ 잔망스런 아이로 자랐다. 크게 애쓰지 않아도 그녀는 이미 ‘가장’을 경험해 본 자의 여유가 있었다. 후에 언니가 학교를 가기 위해 다시 우리 집으로 왔지만 들어보니 언니도 나름대로 가족에게 섞이지 못하고 맴도는 시기가 있었던 것 같다. 그것이 불만 많고 사나운 승질로 드러났던 것 같다. 아무 걱정 없이 행복했을 것 같은 나인데, 어린이들도 각자의 사정으로 상처를 안고 나아가고 그랬나 보다. 그건 언니 사정이었고, 난 내 사정이 급했다. 이래저래 푸대접은 오직 내 몫이었다.


어린 마음이 서서히 곪아가다 터진 건 시끌벅적한 설날이었다. 가문이 융성할 때는 뭐니 뭐니 해도 아이들이 콩나물처럼 쑥쑥 자랄 때가 아닌가 싶다. 설날이면 시골 작은 안방에 까만 뒤통수가 바글바글했다. 떡국 한 그릇씩 먹이려면 집에서 제일 큰 솥을 꺼내야 하는 날이었다. 상을 물리고 할머니, 할아버지부터 어른들이 둘러앉아 계시면 사촌들을 비롯한 우리들은 일렬종대를 하고 세배를 올렸다. 세배가 끝나면 어른들은 약속이나 한 듯이 덕담과 함께 지갑을 열었다. 뭐 크게 잘 사는 집이 없어도 이날은 괜히 인심이 후해지는 날이다. 시퍼런 만 원짜리가 이리 가고 저리 가고, 주는 이는 진지해지고, 받는 이는 공손해지는 날이다. 전날부터 이번에는 세뱃돈을 얼마나 받을까? 받으면 뭘 할까? 부푼 계획들로 가득한 마음에 오가는 세뱃돈이 얼마인지 단숨에 스캔할 수 있을 정도로 예민해진다.


그런데, 내가 화가 나는 건 그거였다. 언니랑 나는 고작 한 살 차이인데, 꼭 언니는 나보다 한두 장을 더 얹어주면서, 무려 세 살 차이가 나는 남동생과 나는! 꼭 똑같은 용돈을 아무렇지 않게 주는 것이다. 이건 아니지 않나? 나는 결국 폭발했다. 주목받으면 말 못 하는 내가 서러운 마음에 한 마디 한 마디 힘을 주어 외쳤다.


“언니는! 첫째라서 이뻐하고! 동생은! 남자라서 이뻐하고! 나는! 다시는! 할머니 집에 안! 올 거야!”


평소 가장자리 포지션에 알맞게 얌전하고 말 잘 듣고 잘 웃는 순하다고 여겨지는 나의 정체성을 찾기 위한 첫 외침이었다. 나는 꺼이꺼이 울었다. 그간 마음에 켜켜이 쌓아둔 설움이 터져 나오니 울음소리는 통곡이 되어갔고, 토해도 토해도 내 마음은 계속 서러웠다. 그리고 이상하게 살아도 살아도 태초의 내 설움은 사라지지 않는다. 할머니는 나를 어르고 알겠다고 잘못했다고 하면서도 웃음을 참지 못했다. 그 용기 있던 외침은 눈물이 마르자 살짝 머쓱해졌고, 할머니가 보태준 얼마간의 용돈과 정신 못 차리게 달고 단 사탕으로 금세 막을 내린다.


나는 알았다. 울어도 소용없는 걸. 아마도 내게 주어진 역할은 평생 이 가장자리일 거라고. 태생이 그러하니 어쩔 수 없는 건지 그렇게 잠깐 ‘가장’이 되고 싶었던 나는 ‘가장’이 될까 봐 전전긍긍하는 ‘가장자리’가 되었다. 시험을 잘 보고도 1등일까 봐 겁이 났고, 누군가 내 존재를 알아채는 게 부담스러웠다. 도드라지지 않고 묻혀서 기억나지 않아야 하는 것이 내 삶의 숙명인 것처럼 받아들이고 산다. 하지만 그런대로 나도 살아있다고 꽥 한 번은 소리 질러봐야 하지 않겠나. 그래서 나는 글을 쓰고 싶다. 못난이들 가장자리 인간들을 위한 외침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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