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라
“전학생이다!”
발 빠른 남자아이가 외치며 교실 앞문으로 뛰어 들어왔다. 잠시 뒤 선생님을 따라온 아이는 연갈색 머리에 유난히 얼굴이 하얗고 볼이 통통했다. 검은 셔츠에 검은 청바지 빨간 멜빵을 한 아이가 자기소개를 한다.
“내 이름은 홍보라야. 서울에서 왔어. 앞으로 잘 지내자.”
4 분단 맨 앞에 앉은 나에게 보라가 신은 실내화의 하얀 코가 반갑게 인사를 건네는 듯했다. 새로운 친구를 탐색하는 눈빛으로 교실은 온통 반짝였고, 멍하니 창밖을 보며 딴생각하기 좋아하는 나도 그날은 창밖이 아닌 칠판을 오래 바라보았다. 조용히 있는 듯 없는 듯 학교를 다니던 나는 공부도 그럭저럭 학교생활도 그럭저럭. 큰 어려움도 큰 즐거움도 없이 지내던 50명 안팎의 반 아이들 중 수많은 중간의 아이였다. 친구도 공부도 크게 욕심내지 않아도 하루해는 아쉽도록 짧은 어린 시절이었다.
전학생은 이름이 참 예뻤다. 가만히 소리 내어 보게 하는 이름이었다. 보-오-라. 소리 내는 것만으로 입안이 달달해지는 풍선껌 같은 이름. 우리가 태어날 당시 한글로 이름 짓는 게 유행이 되며 반에는 옥경이부터 한솔이까지, 60년대부터 80년대의 이름까지 어울려 있었다. 반 아이들 이름을 보는 것만으로 급성장 중인 우리나라가 고스란히 보였다. 그러고 보면 연주라는 내 이름마저도 옥경이와 한솔이의 중간쯤 되는 이름이었다. 그런 중간의 나에게 홍보라라는 이름은 저만큼 앞서게 예뻐 보였다. 단정하고 야무지며 성격도 좋았던 보라는 금세 아이들의 관심을 받고 잘 어울렸다. 무뚝뚝한 담임선생님조차도 “너는 검정이지? 성은 홍이니까 빨간색이고, 이름은 보라니까 섞으면 검은색이잖아.” 하며 어설픈 농담을 건네며 웃었다. 1980년대, 흑백이 컬러로 변하던 시대. 그 시대처럼 내 세상도 보라와 만나고 난 후 컬러로 전환되었다.
보라와 내가 짝이 되었던가. 처음 우리가 어떻게 친해졌는지는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어쨌든 보라랑 나는 14번 버스를 타고 학교를 오가며 가까워졌다. 보라네 집은 우리 집과 5분 거리의 빌라 2층이었다. 보라 아빠는 무슨 공부를 하신다고 했고, 날씬하고 키 크고 잘 웃는 보라 엄마는 더 날씬해지기 위해 에어로빅을 다니신다고 했다. 날 볼 때마다 “아휴, 연주는 말라서 좋겠다.” 하며 늘 사람 좋은 웃음으로 맞았다. 보라가 어느 날 데려간 집에는 책이 정말 많았다. 거실 책장에는 두꺼운 책들이 꽉 차 있었다. 책이라고는 앞집 현정이네서 빌려 읽은 위인전이 전부였던 내게 그 모습은 참 생경했다. 읽고 싶은 책이 생기면 보라는 스스럼없이 빌려줬고 땀범벅으로 뛰놀며 하루를 보내던 나는 방구석에서 책 읽기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처음으로 책을 집어삼키는 즐거움을 알아버렸다. 풍선껌처럼 보라의 책은 나의 세상을 커다랗게 부풀게 했다.
보라는 그림을 잘 그렸다. 색색의 물감을 짜서 말린 팔레트를 열어 채색을 할 때 나는 비로소 수채화의 농담(濃淡)을 알았다. 물을 얼마나 섞느냐에 따라 어떤 물감을 섞느냐에 따라 빨강, 노랑, 파랑으로 이름 붙이지 못하지만 분명히 있는 그 경계의 색들이 도화지에 칠해졌다. 선을 넘나들며 서로의 색을 주고받는 수채화의 매력처럼 보라와 나도 무람없이 서로의 일상에 섞이기 시작한다.
지금은 보라네 집이 있던 자리에 6차선 도로가 나 버렸지만, 여전히 그 길을 지날 때면 아스팔트 위에 보라네 집이 다시 세워지고, 수풀이 촘촘했던 들판이 펼쳐진다. 그해 여름방학, 우리는 수풀을 뒤지며 식물도감을 만들었다. 흔하게 보던 강아지풀도 두꺼운 책 사이에 넣어 말려 부서지지 않게 옮기고 이름을 적고 습자지를 덮어 정성스럽게 만들면 그럴듯한 식물도감의 한 페이지가 되었다. 색은 바래도 강아지풀 한가득 뜨거운 햇살이 박제되었듯, 여름날 열한 살의 우리들도 기억의 도감 속에 여전히 남아있다.
2년을 같은 반이었던 우리는 6학년이 되면서 다른 반이 되었다. 보라는 3반, 나는 8반. 3과 8 사이의 거리만큼만 멀어지는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생각보다 보라는 더 멀리 갔다. 6학년이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보라는 서울로 전학을 갔다. 보라는 마지막으로 내게 <안네의 일기> 책을 주고 갔다. 이후 나는 안네처럼 숨죽여 책을 읽고 일기를 쓰는 것으로 사춘기를 보냈다. 나는 책 읽기를 좋아하고 글쓰기를 좋아하는 아이로 자라나고 있었다. 보라가 전학을 가고 같은 반이었던 친구들도 하나 둘 전학을 갔다. 원주는 군인 가족들이 많았고, 아이들의 전학은 잦았다. 여러 번 전학을 겪었던 아이들도 눈물을 흠뻑 쏟으며 이사를 갔다. 그런 나이였다. 눈물을 참기보다 쏟아내는 게 쉬운 나이였다. 하지만 떠나는 친구들의 우는 모습을 보고도 남겨지는 나는 울지 않았다. 울기까지 하면 정말 너무 억울할 것 같았다. 보라와도 그렇게 작별을 했고 마지막은 기억나지 않을 만큼 흐릿하다.
나는 남았다. 그렇다고 많이 외로웠던 건 아닌 것 같다. 아이들은 옆에 가까이 있는 친구가 금방 빈자리를 채우기 마련이니까. 새로 같은 반이 된 친구들과 아무렇지 않게 복도를 뛰어다니고 칠판지우개를 털고 운동장을 누볐다. 하지만 단짝 친구라는 반짝이는 걸 갖지 못한 느낌으로 가끔 혼자였던 것 같다.
보라가 전학을 가고 얼마간은 편지가 오갔다. 손을 놓은 건 나였다. 그 마음을 자존심이라고 불러도 되나. 세월이 지나 내 기억이 각색된 게 아니라면, 어렴풋이 속상했던 마음을 기억해 내자면 그랬다.
‘연주야, 기억나지? 지연이, 한영이 모두 서울로 이사를 왔어. 오늘 친구들을 만나 스케이트를 탔어. 함께 너 이야기도 했어. 잘 지내지?’
보라의 편지 속에 여러 친구들의 이름들이 함께 나열되고 그들은 한편이 되어 있었다. 순간, 나는 단박에 초라해졌다. 나와 같이 식물채집을 하던 보라와 아이스링크에서 스케이트를 타는 보라. 그 아이들과 나는 다르구나 느끼며 내 마음을 반 접어 손톱으로 꾹꾹 눌러 금을 그어 버렸다. 보라는 그냥 썼을 이야기에 혼자 맞은 내 맘만 멍들어갔다. 아마 그 편지가 마지막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보라는 잊혀 갔고 내 옆에는 같이 웃는 친구들이 생겼고 금방 자라 고등학생이 되었다. 오전부터 밤까지 학교에서 함께 하는 친구들이 있었고 외로울 틈이 없는 시절이었다. 이른 아침 등굣길도, 가수면 상태인 수업 시간도, 야간자율학습 끝나는 늦은 밤에도 웃지 않을 이유가 없었던 예뻤던 시절. 어느 날, 복도에서 다른 반 친구가 나를 불렀다.
“혹시 홍보라 기억해? 보라가 너 연락처 물어봤어. 보고 싶대.”
그렇게 보라는 다시 내게 손을 내밀었고 얼마간은 연락을 이어갔지만 이내 끊겼다. 띄엄띄엄 나누던 소식의 마지막은 보라가 미대에 갔다는 것이었다. 보라는 보라다운 길을 갔다.
그렇게 놓아버릴 때는 언제고 나는 여전히 보라를 생각한다. 내 인생 처음의 반짝이는 단짝. 보라를 만나고 컬러가 된 세상 이후 나는 제법 내 색대로 살아가고 있다. 연주라는 이름과 닮은 연두색처럼 설레는 마음으로. 그리고 내 마음 한편 그리움으로 남은 보라색. 보라색을 볼 때마다 매번 보라를 떠올리는 건 아니지만, 보라색을 내가 언제부터 좋아했던가 떠올려 보면 달달한 풍선껌같이 부풀던 그 시절부터가 아니었을까. 그때는 미처 몰랐던 보라색과 연두색이 조화로운 풍경을 가끔 떠올린다. 언젠가 보라를 다시 만나는 날이 오면 그때는 나의 색이 너무 엷어 자신이 없었다고 말해줄 거다. 지금은 흐렸던 나의 연두색도 제법 진해져 가고 있다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