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선생님
1986년. 내가 왼쪽 가슴팍에 명찰과 손수건을 매달고 초등학교 입학이란 것을 한다. 당시 입학 사진을 보면 잔뜩 긴장을 해서 뭔가 환한 것을 본 것처럼 눈을 잔뜩 찌푸리고 있다. 뭔가 환한 세상이 앞에 있는 것처럼 말이다.
복장으로 말할 것 같으면 무릎까지 올라오는 빨간 장화에 핑크색 잠바를 입고 머리는 단발에 파마를 말아놨다. 학교 앞에서 입학 사진을 찍는 사진사 아저씨가 씌워놓은 빨간 빵모자에 꽃목걸이까지, 어리둥절한 모양새다. 분명 엄마가 밀어 넣어 사진을 찍었겠지만 그 덕에 나는 지금도 그때의 우습고 귀여운 아이를 만난다.
우리 시대 때 아이들은 너무 흔하고 많고, 그리고 시끄러웠다. 예의를 갖추지 못해서라기보다 역동적으로 변하는 세상 전체가 들썩이는 고성장의 시대였다. 우리 역시 발맞춰 적당한 요란으로 시대에 맞게 커갔다. 이렇게 세상이 조용하고 아이가 귀해지는 시대가 오리란 걸 그땐 정말 몰랐다.
커다란 운동장에 ‘앞으로 나란히’ 해서 간격을 맞춰 빽빽하게 선 채로 입학식을 했다. 나는 1학년 4반이 되었다. 우리 반은 본관 뒤 건물 1층이었고,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마주 보고 있었다. 교실에서 나와서 걸어가면 거꾸로 매겨진 4반, 3반, 2반, 1반이 있었고, 1반 끝에는 밖으로 이어지는 낮은 계단이 있었다. 집을 나와 처음으로 온 학교는 미로 같았고, 그렇잖아도 두근대는 마음은 복잡한 건물에 들어서니 두려움은 더 커졌다. 나가는 문을 찾을 수 있나 싶게 아득하고 모든 게 낯설었다.
운동장에 배정받은 반대로 줄을 섰던 우리는 멀리서 소개받은 선생님의 인솔을 받아 교실로 들어왔다. 교실은 잔뜩 긴장한 나 같은 아이들과 어디에 가서도 기죽을 리 없는 개구쟁이들, 그리고 처음이라는 게 무색한 야무진 아이들 등 몇 무리로 나뉘어 있었다.
처음 알을 깨고 나와 본 것을 엄마로 각인하는 오리처럼 나는 선생님만 봤다. 나의 눈은 교탁 앞에 있는 선생님만을 따라 움직였다. 선생님에게 환한 빛이 보이는 것처럼. 우리 선생님은 키가 아주 컸고, 단발과 커트 중간의 짧은 머리였다. 선생님은 임용 후 첫 발령을 받은 새내기였고, 우리는 선생님이 맡은 첫 학생들이었다. 선생님이나 우리나 학교는 낯선 곳이었고, 새로운 출발선이었다. 아직 어린 티를 벗지 못한 것은 선생님이나 우리나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오십 명이 넘는 아이들을 한 반에 있으니 그 소란스러움이야 말할 필요도 없다. 선생님이 교탁에 자리를 잡고 밝게 웃으며 자기소개를 했다. 상기된 선생님은 뺨은 붉었고, 그 덕분에 살색 스타킹을 신은 선생님이 덜 추워 보였다.
“1학년 4반 친구들, 안녕하세요, 선생님과 1년 함께 생활하게 되었어요. 만나서 정말 반가워요.”
하고는 뒤돌아서 칠판에 크게 이름을 쓴다. 동그라미가 그려지고 길게 막대하나, 옆으로 선 하나 더하고, 단정하게 니은 받침이 그려진다. 자그맣게 ‘아아안’하고 읽어본다. 그다음도 동그라미로 시작한다. ‘으으은’, 이름의 마지막 글자도 역시 동그라미다. ‘여여—영’. 드디어 선생님의 이름이 완성됐다.
안.은.영.
‘선생님의 이름에는 동그라미가 다 들어가 있네’ 생각하며 선생님을 봤는데, 선생님은 동그라미 보다 기다란 막대기가 어울리는 것 같았다. 키 작은 나는 맨 앞자리에 앉아서 안은영, 안은영, 안은영. 계속 발음해 본다. 엄마가 몇 반인지 그리고 선생님 이름, 그것 두 개는 꼭 기억해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잊지 않으려고 계속 입안에 그 이름을 굴려 불러봤다. 이응, 이응, 이응으로 시작하는 선생님의 이름은 내 입에서 데굴데굴 잘 굴러갔고 엄마가 내준 숙제인 선생님 이름 외우기를 쉽게 완수해 냈다. 잊지 않으려고 입안에 머금고 있던 선생님 이름을 나 혼자 발음하다 보니, 급하게 꼬여 “안녕 선생님”하고 소리를 냈다. 그때부터 나의 첫 담임 선생님을 나 혼자 ‘안녕 선생님’이라고 불렀다.
나는 안녕 선생님이 화내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겨우 여덟 살이 된 아이들이 오십 명씩 바글대는 교실에서 선생님이 어떻게 화를 내지 않을 수 있었는지 지금도 궁금하다.
나는 같은 유치원을 나온 종혁이라는 개구쟁이 남자아이와 짝이 되었다. 까무잡잡하고 눈이 땡글땡글한 게 영민해 보이지만 장난이 말할 수 없이 심했다. 여덟 살 남자 아이랑 여자 아이가 짝으로 만나 싸울 일을 수백 가지도 더 될 것이다. 그리고 싸움이라는 게 늘 그렇듯 시작은 생각이 안 나고 끝은 점점 격해진다. 종혁이랑 나는 사소한 말다툼을 시작했고, 그 기세는 팽팽했다. 근데 그 녀석이 마지막에 웃으며 “너네 엄마 바보지?”하고 말하는데 나는 참을 수가 없었다. 무슨 용기였는지 책상을 밀고 저벅저벅 걸어서 다음 수업 준비에 바쁜 선생님 옆으로 가서,
“선생님! 쟤가 우리 엄마 바보라고 했어요! 우리 엄만! 바보 아니에요!”
하고는 엉엉 울음을 터트렸다. 내가 이렇게 상황을 정면돌파할 줄 몰랐던 녀석의 그 표정. 나의 회심의 반격은 통했다. 안녕 선생님은 부드럽지만 단호하게 종혁이를 교단 앞으로 불러냈고, 종혁이는 분함을 못 견뎌서 눈물 콧물 범벅이 된 채로 씩씩대는 내게 미안하다는 사과를 해야만 했다. 나는 그 장난꾸러기를 이겼다는 마음에, 그리고 선생님의 지지를 받았다는 마음에 꽤나 나를 멋지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어느 날 하교 시간, 1학년 중에서도 키는 작고 야문 구석이 하나도 없는 나는 건물에서 밖으로 이어지는 낮은 계단, 정말 낮았다. 3개가 전부인 계단, 높이로 치며 넉넉히 잡아도 70센티가 될까. 거기서 발을 헛디뎌 떨어졌다. 마침 옆에 있던 친구가 더 놀라며 선생님을 찾으러 갔고, 그사이 나는 아프진 않지만 ‘울어야 하는 건가 봐’ 하고 울기 시작했더랬다.
계단에서 떨어졌다는 친구의 말에 헐레벌떡 달려온 안녕 선생님은 1학년 아이가 굴러 떨어졌을 그 높은 계단을 찾아 두리번댔지만, 이게 계단이었나 생각하지 못할 만큼 낮은 계단 밑에 먼지를 뒤집어쓴 내가 울고 있었을 것이다. 이렇게 엉망인 일이 수시로 일어나는 게 1학년이겠지. 선생님은 말없이 따뜻하게 안아 날 일으켜주고 먼지에 눈물로 엉망인 내 얼굴을 가슴에 매단 손수건으로 닦아주셨다. 안녕 선생님은 그렇게 따뜻한 내 학창 시절 ‘첫 선생님’이었다.
학년에 바뀌고, 덜 떨어진 나는 새로운 학년을 따라가는 것도 허겁지겁이라 선생님이 다른 학년을 맡았는지 전근을 가셨는지 잘 기억하지 못한다. 2학년 때는 호랑이 선생님으로 유명한 나이 지긋한 남자 선생님이 담임이 되었고, 나는 2학년의 어느 시절도 기억하지 못한다. 암흑이었던 건지, 기억력이 없는 건지. 그리고 금방 3학년이 되었다.
그즈음 내가 기억하는 건, TV에 나온 담다디를 부르던 ‘이상은’이라는 가수다. 커트 머리, 큰 키에 웃는 모습까지 너무 익숙한 모습. 엄마가 먼저 알아챘다.
“어머, 저 가수는 꼭 너 1학년 때 담임선생님 같다. 그치?”
그 뒤로 안녕 선생님은 가수 이상은에 포개져서 오래도록 내 기억에 남았다. 나의 첫 선생님이 ‘안은영 선생님’이라서 나는 여전히 1학년 그때를 따뜻하게 떠올린다. 이제 나의 딸도 1학년은 가마득한 나이가 되었고, 나에게 그 시절은 더 멀어져 까마득해졌다. 선생님의 모습도 어렴풋한 이미지만 남았다. 하지만 여전히 생생하다. 나의 첫 사회생활에 따뜻한 어른이 있었다는 것. 그건 사는 내내 세상이 안전하다는 메시지를 줬던 것 같다.
‘젊은 날엔 젊음을 모르고, 사랑할 땐 사랑할 땐 사랑이 보이지 않았네'는 노래가 흘러나오는 날이면 나는 자동으로 1학년 그 시절을 떠올린다.
나의 안녕 선생님은 안녕하실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