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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엘리 Jun 23. 2021

답답한 건 잠시 잊고 추억 한 권 꺼내보는 시간

나는 형제 많은 집에서 태어났다. 옷이나 가방 등은 언니들 걸 물려입었으니 나만의 것을 소유한 기억이 거의 없다. 우리 엄마는 손재주가 좋으셨는지 색색 실로 치마를 떠주셔서 언니들부터 나까지 물려입게 하셨다. 살림만 하지는 않으셨던 엄마지만 틈틈이 대바늘로 뭔가를 뜨고 계셨다. 실을 한 번만 쓰면 아깝다고, 치마 만들었던 실을 풀어서 목도리도 만들고 개바지(지금의 속바지인데 그때는 왜 개바지라고 불렀는지 모르겠다)도 만들고 하셨다.

다만 지금까지 생생하게 기억하는 '내 것'이 있다. 다른 누구의 것을 물려받은 게 아닌 순수한 내 것, 바로 동화책이다. 일곱 살 즈음으로 기억한다. 누가 왜 나한테 사줬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백조 왕자>라는 동화책을 사준 것이다. 아무도 읽지 않아 표지며 안에 속지가 빳빳한 새 책 말이다. 어린 마음에 얼마나 좋았는지 계속 갖고 다녔고 밤에 잘 때도 머리맡에 올려놓았다. 아침에 일어나면 제일 먼저 하는 일이 동화책이 잘 있나 확인하는 거였다. 지금도 공주가 가시 달린 식물로 오빠들의 옷을 짜는 그림이 기억난다. 

너무 좋아서 읽고 또 읽었는데, 어느 날 나보다 다섯 살 많은 오빠가 나한테 너는 왜 같은 책을 계속 읽냐고 물어보았다. 같은 책을 여러 번 읽는 게 창피했던 나는 대답을 못하고 얼버무렸는데, 오빠가 "동화책은 여러 번 읽어도 돼."라는 말에 안심이 되기도 했다. 책을 반복해서 읽는 걸 왜 창피하게 생각했는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자신의 감정을 감추며 살아야 한다는 걸 일찍부터 깨달았던 걸까?

넉넉하지 않은 살림이었지만, 교육열만큼은 남에게 뒤지지 않으셨던 우리 엄마는 자식들을 위해 전집을 구입하셨는데, 그게 바로 '계몽사 문고'였다. 계몽사 문고는 '소년소녀세계문학전집' 이후에 나온 시리즈로 모두 120권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당시 자금이 부족하셨는지 아니면 엄마가 구입할 당시에는 50권만 나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우리 집에 있던 건 50권이었다. 

하얀 표지에 그림이 그려져 있던 '계몽사 문고'는 내 유년 시절을 오랫동안 함께했다. 아직도 기억난다. <하늘을 나는 교실>, <아이반호우>, <80일간의 세계일주>, <한초군담>, <다리 긴 아저씨>(<키다리 아저씨> 번역을 이렇게 했다), <빨강 머리 앤>, <투명 인간>, <홍당무>, <시이튼 동물기>, <지저세계 펠루시다> 등은 정말 재미있어서 읽고 또 읽었다. 지금까지 알고 있는 중국 역사는 그 당시 읽었던 <한초군담>에서 알게 된 지식이고,  <지저세계 펠루시다>는 나에게 SF소설의 재미를 알게 해준 책이다. 그때 읽은 <다리 긴 아저씨>는 어릴 적 소녀 감성을 한껏 자극해서 나의 최애 책이었다. 그중에서 <80일간의 세계일주>를 가장 많이 읽었던 것 같다. 내기를 해서 80일 만에 세계 일주를 하고 집으로 돌아오기로 했는데, 81일 만에 돌아와 내기에 졌는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라 지구 동쪽으로 돌게 되면서 하루에 4분씩 짧아져서 24시간을 벌게 되어 내기에 이겼다는, 아주 통쾌한 이야기였다. 

그 당시 많은 책이 그랬듯이 일본어로 번역되어 있는 책을 한글로 다시 번역했기에 번역 상태도 그리 좋지 않았을 테고 어색한 부분도 많았을 테지만 어린 시절에는 그런 거 따질 겨를 없이 재밌게만 보았다. 인터넷을 찾아보니 1979년에는 한 권당 960원이었는데 1980년이 되면서 1,280원으로 올랐다고 한다. 

어제 <막내의 뜰>이라는 책의 소개 글을 읽고 보니 내 어린 시절이 오버랩되어 추억에 한번 빠져봤다. 그때는 친구들이랑 어울려 놀기도 많이 했지만, 심심할 때도 많아서 혼자 뒹굴거리며 공책 옆 빈 곳에 만화를 그리거나 책을 읽으며 시간을 흘려보냈다. 생각해 보니 그때는 꿈만 꾸면 되니 참 좋은 시절이었다. 그래도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냐고 물으면 싫다고 하고 싶다. 이번 생에서 유년 시절은 한 번이면 충분한 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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