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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엘리 Jun 25. 2021

십 년째 초보운전

태어나기를 몸치로 태어난 나는 몸으로 하는 걸 익히기까지 시간이 많이 걸리는 편이다. 남들보다 훨씬 더 많은 노력과 시간을 투자해야 겨우 그냥저냥 하는 정도의 수준이 된다. 배우는 속도가 느리고 뻣뻣하다 보니 별명이 '각목'인 적도 있었다. 게다가 겁이 많고 걱정까지 많은 성격이어서 다른 사람들이 못하는 나를 보면 얼마나 웃을까 하는 생각에 더 움츠러들었던 것 같다. 볼링을 배울 때도 그랬고 포켓볼을 배울 때도 그랬고 스키를 배울 때도 그랬다. 지금 배우고 있는 골프도 그렇다. 

나의 이런 성향의 끝장을 보여준 것은 '운전'이 아닐까 싶다. 십 년을 운전했지만 며칠 전에 면허를 딴 듯한 실력을 보유하고 있다. 내 지인들은 십 년째 한결같은 내 운전 실력에 놀라워하고, 내 조카들은 운전 못하는 사람을 말할 때는 으레 나와 비교한다. 내가 운전을 못한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있기 때문인지 운전하는 것 자체가 즐거운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총체적 난국은 내비게이션을 잘 못 본다는 거다. 내가 잘 못 보는 것도 있지만, 도로에 이정표가 너무 헷갈리게 표시되어 있는 데다 갑자기 차선을 변경해야 하는 곳도 있어서 난감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7~8년 전 아이가 초등학생 때 분당에 있는 잡월드를 갔다. 집에서 한 시간 넘게 걸리는 곳인데, 그래도 갈 때는 잘 찾아갔다가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내부순환도로를 못 타서 무슨 간선도로를 몇 번이나 왔다갔다 한 적이 있다. 그때를 생각하면 아직도 등골이 서늘하다. 

운전을 항상 하는 게 아니라 일이 있을 때만 하다 보니 지금도 운전이 서툴고, 초행길은 긴장을 많이 하게 된다. 초행길에 터널까지 있으면 긴장이 지나쳐 숨이 잘 안 쉬어지기도 한다. 운전을 잘하려면 많이 해봐야 하는데, 내가 꼭 운전해야 하는 상황이 자주 있지 않으니 점점 더 안 하게 되는 듯하다. 

운전을 못하는 것에 대한 작은 항변을 하자면 나는 운전 연수를 받지 않았다. 면허를 따고 바로 차 끌고 옆에 남편을 앉힌 채 이마트에 가서 장을 보고 왔다. 그 어렵다는 '남편한테 운전 배우기'를 난 한 여자다. 

이렇게 십 년째 초보운전 중임을 커밍아웃하는 이유는,, 다음주부터 날마다 하루 네 시간씩 영상 편집을 배우러 다니기 때문이다. 북트레일러를 혼자 잘 만들고 싶어서 신청했지만, 한번도 다루지 않았던 프리미어 프로와 에프터이펙트(이 프로그램들은 이름부터 어렵다 ㅠ)를 배울 생각을 하니 설렘보다 걱정과 불안이 앞선다. 예전에 포토샵 처음 배울 때가 떠오르며 다시 반복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에 머리가 복잡해진다. 영상편집 프로그램은 포토샵이나 일러스트보다 더 어렵다고 하는데, 너무 힘들면 중간에 포기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하나를 알면 둘을 까먹는 나이에 괜한 짓을 하는 건 아닐까 걱정스럽다. 이미 며칠 전부터 내 얼굴은 점점 흙빛으로 변하고 있다. 사실 북트레일러를 만들고 싶으면 전문가에게 의뢰해도 된다. 그런 프로그램 잘 다루는 사람은 얼마든지 있으니까. 그런데 내가 왜 이러는 건지 나도 잘 모르겠다. 누구 말처럼 '배움 중독'이라는 심각한 병에 걸린 것일지도. 

내가 태어나서 잘한 일 가운데 하나가 포토샵과 일러스트와 인디자인을 배운 건데, 거기에 프리미어 프로와 에프터이펙트가 추가가 될지, 아니면 괜한 짓을 한 건지 한 달 뒤면 알 수 있게 되겠지. 하지만 믿고 싶다. 배우는 데 '괜한 짓'은 없다고. 애쓰고 배우는 게 당장 내 삶을 바꾸는 건 아닐지라도 내 안 어딘가에 다 들어가 있는 거라고. 그리고 배운다고 해서 그게 내 삶을 바꾸지 않아도 되는 거니까. 갑자기 그런 의문이 든다. 꼭 내 삶을 바꾸는 게 좋은 건가? 그냥 좀 지금처럼 살면 안 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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