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앨 엘버레즈,<자살의 연구> 최승자 역
이 책을 집어든 건 오롯이 번역자 때문이었다.
정신적으로 가장 괴로웠던 시기를 지나며 이 책을 번역한 최승자 시인.
그녀가 이 책을 읽고, 옮기며, 문장과 문장 사이에서 어떤 마음이었을까. 그 마음을 상상해보고 싶었다.
『자살의 연구』는 단순한 분석서도, 차가운 이론서도 아니다.
이 책은 너무도 훌륭한 학술서이자 비평서이며, 동시에 하나의 문학작품이다.
자살이라는 키워드 하나로 고대 그리스부터 르네상스를 거쳐 낭만주의, 다다이즘, 그리고 현대문학까지를 꿰뚫어 설명해낸다.
엘버레즈의 글쓰기는 유려하고 논증은 치밀하다.
읽다보면 ‘옥스퍼드 영문과 수석 졸업’, ‘<옵저버>의 고정 평론가’라는 그의 이력이 결코 허명이 아님을 실감하게 된다. 하지만 이 책의 내면에는 그보다 더 깊고 사적인, 그리고 자기 고백적인 서사가 숨어 있다.
그는 실비아 플라스의 친구였다.
젊은 문학평론가였던 엘버레즈는, 당시 영국에 도착한 미국 시인을 주목했다.
풀브라이트 장학금을 받고 케임브리지로 온 실비아 플라스는 이미 강렬한 개성과 자신감을 지닌 인물이었다. 당시 이미 시인으로 명성을 얻고 있던 테드 휴즈와의 결혼 직후, 실비아는 엘버레즈에게 자신의 작품을 가장 먼저 보여주는 비평가이자 친구가 된다. 그녀의 시를 누구보다 이해했던 사람이 바로 그였지만,
그녀의 정신 상태가 얼마나 위험한 경지에 이르렀는지는 끝내 알아채지 못했다.
그녀의 죽음 이후, 그는 묻기 시작했다.
“도대체 자살이란 무엇인가.”
그 질문은 곧 자신을 향한 질문이 되었고, 그렇게 그는 이 책을 써내려간다.
엘버레즈는 이 책에서 자살에 대한 이중적 태도를 꿰뚫는다. 자살은 한편으로는 고귀하고 고상한 정신적 선택으로 추앙받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죄악이자 나약함의 상징으로 낙인 찍혔다.
‘영웅적 자살’은 철학적이고 남성적인 태도였고, 반면 우울, 빈곤, 부적응, 외로움으로 인한 자살은 ‘패배자’의 서사로 취급됐다. 심지어 20세기 초반까지도 그런 자살은 형법으로 처벌되었고, 가족들마저 조롱과 수치 속에 방치되었다.
엘은 그 구분을 명확히 드러내진 않지만, 나는 생각하게 된다.
‘정신적 자살’은 남성적 죽음이고, ‘감정적 자살’은 여성의 몫으로 치부되었던 것은 아닐까.
그런 맥락에서 본다면, 실비아 플라스의 죽음은 당대 사회가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이었다.
두 아이를 남겨두고, 남편과의 경쟁에서 시인으로서 자리를 지키고자 했던 여성.
그녀는 ‘남성적 자살’을 감행한 ‘건방진 여자’로 여겨졌는지도 모른다.
그것이야말로 사회가 실비아를 향해 가했던 또 다른 죽음, 사회적 사형이었다.
이 책은 문학을 사랑하는 이들이 반드시 한 번쯤 읽어야 할 책이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건, 이 책을 쓴 사람이 실비아 플라스를 진심으로 아꼈던 단 한 사람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는 비평가이면서 친구였고, 냉정한 시선을 갖추었지만 끝내 그녀를 붙잡지 못했다는 죄책감을 품은 인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