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도 박둥둥의 월급루팔 도서리뷰
펭귄북스의 세계문학전집이 사실상 한국에서는 폐간이 된 거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요즘은 세계문학전집 시장도 치열해서 펭귄북스도 결국 한국시장에서 밀려나게 된 것이겠지.
사실 펭귄북스가 한국에 진출한다고 했을 때부터 나는 회의적이었다. 기존의 민음사나 문학동네, 열린 책들의 전집보다 구체적으로 어떤 장점이 있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영미권에서 펭귄은 저작권이 풀린 고전을 싸게 배포하여 고전에 대한 독자의 접근성을 높였다던데, 한국어판 펭귄은 딱히 싸지도 않았고, 번역에 있어서도 다른 전집보다 월등하게 수준이 높은 것 같지도 않았다. 장정이나 디자인도 열린책들처럼 예쁜 것도 아니니, 독자가 굳이 펭귄이라는 브랜드를 고집할 이유가 없어 보였던 것이다.
그럼에도 펭귄에 장점이 없는 건 아니었는데, 이제까지 한국어로 번역되지 않은 명작이나 유명한 작가의 마이너 한 작품등을 번역한 것은 좋았다. 레드클리프 홀의 <고독의 우물> 도 그런 작품 중 하나였다.
이 작가와 작품을 알게 된 것은 번역본이 나오기 몇 년 전이었다. 배수아 작가의 소개글을 보고 흥미로워서 읽고 싶었지만 번역본이 없어 이걸 영어로 읽어야 하나... 하면서 망설이던 차에 임옥희 선생님 번역으로 펭귄에서 나왔으니 안 살 이유가 없었다.
레드클리프 홀은 1880년 영국에서 '여자'로 태어났다. 그러나 성장해 가면서 그는 항상 자신이 여자가 아니라 '남자'라고 생각했다. 그의 부모는 그가 어릴 때 이혼하여 그는 어머니 밑에서 성장했다. 하지만 빅토리아 시대의 영국에 이런 아이를 이해해 줄 부모가 있을 리 만무했기에, 그는 어머니와 심한 갈등을 빚으면서도 남장을 고집했다.
그를 저버린 듯한 야속한 신은 그래도 그에게 두 가지의 큰 선물을 주었다. 하나는 명석한 머리와 글솜씨였고, 두 번째는 아버지가 젊은 나이에 막대한 유산을 남기고 사망하면서 그가 유일한 상속자가 되었던 것이다. 덕분에 홀은 평생 창작과 예술활동에만 전념하며 마음껏 남장을 하고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었다.
<고독의 우물>은 약간의 픽션을 가미해서 작가 자신의 자전적 내용을 소설로 집필한 대표작이다. 내가 이 작품을 사서 읽던 그때까지만 해도 이 작품을 두고 레즈비언 작품의 대표작이라 했지만, 요즘의 인식으로는 자신을 남성으로 인식하는 스티븐의 이야기를 그린 이 작품을 트랜스젠더적 작품이라고는 해도 '레즈비언' 작품이라 하지는 않는다. 이 작품이 발행 당시에 (당연하게도) 영국에서 발행금지 처분이 났을 때, 홀 자신이 법정에서 '남성'이 '여성'을 사랑하는 이성애 작품이니 문제없다고 주장한 것도 이를 뒷받침한다.
21세기에도 '그' 혹은 '그녀'를 그토록이나 이해해주지 못했는데 그녀가 살았던 시대의 영국은 더욱 말할 필요도 없었다. <고독의 우물>은 제목 그대로 아무에게도 (심지어 가장 사랑하는 파트너에게도) 있는 그대로 온전히 존중받지 못하는 존재의 슬픔을 담담하게 그리고 있다.
그리고 그 주제는 확장되어 결국 인간이라면 누구나 완전히 이해받지 못하는 슬픈 숙명을 가진 존재라는 메시지가 작품이 진행될수록 깊은 우물 밑에서 누군가 써 보낸 젖은 편지처럼 조용히 떠오른다.
누구에게 권하고 싶은 책이냐고 묻는다면, 스스로가 항상 대부분의 사람들 속에 섞여 있다고 믿는 사람들에게 라고 답하고 싶다. 우리의 존재는 그 누구라도 소수성을 가지고 있다. 타인에게 결코 완벽히 이해받을 수 없는 존재라는 공통점을 발견하는 경험만을 한다 해도 이 책을 읽는 것은 의미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