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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려진 문장 / 김근

시 읽기

by 박둥둥


멀리서 꽃 졌다는 소식이 오고 네 얼굴 지워질 것 같은 기분으로, 미처 가보지 못한 곳에서 꽃들 만개했다 져버리고 빛깔도 이름도 끝내 알지 못하겠는데 멀리서 흐려진 마음이 오고 네게 얼굴이 있었다는 사실도 그만 지워질 것 같은 기분으로, 바람 불고 멀리서 비 몰아오고 얼굴이라는 말 애초 에 없었다는 듯이 네가 내 쪽으로 돌아누울 것만 같은 기분으로, 이제 너를 어떻게 알아보나 얼굴도 없이 너는 나를 어떻게 알아보나 우리가 아는 사이인가요 물으면 모르는 사이가 비로소 생겨나고 너는 너라는 지칭도 잃고 아득해만 져버릴 것 같은데 그제야 비로소 사랑할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으로, 와락 껴안고 쓰다듬고 키스를 그러나 키스할 얼굴을 끝내 찾지 못하고 내 얼굴도 그만 지워지고 말 것 같은, 모르는, 얼굴 없는 내가, 모르는, 얼굴 없는 너의 볼모가 될 것 같은, 그러다 내쳐지고 그러다 패대기쳐지고 그러다 매달리고 울고불고할 것 같은 기분으로


-시인 김근은 1973년 전북 고창에서 태어나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했다. 1998년 문학동네 신인상으로 등단했고 시집 『뱀소년의 외출』 『구름극장에서 만나요』가 있다. 현재 '불편' 동인으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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