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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철상 Irondenker Jun 03. 2024

매미, 차라리 발정난 노견에 대한 추측의 글

烏之六感而非圖 ——— 가장 사적이고 모호한 절규

최근 필자 본인의 행보는 발정난 노견과 다름이 없음이다. 직관적이지 아니한 야릇한 비유를 대자면 매미에 가까울 것이다. 육 년의 칩거를 파한 후 벌거숭이처럼 보인 행보임은 감수하고 있었으나, 그 꼴이 이리도 욕될 수 있는가.


벌거벗은 필자 본인(이하 ‘나’라고 칭함)의 육 년간의 다짐은 그의 내면 세계를 깨는 것에 오로지 쓰였다. 학업에서 부여받은 중압감은 나에게 어떤 책임의 첨가도 허하지 않았다. 못배운 천한 놈이 거기서 살아남는 것은, 미지에 대한 공포를 호기심을 바꾸는 것을 바라지 않으니, 다만 공포를 도삭(刀削)하여 떨어져나온 찌꺼기로 나의 주리고 쭈그러든 뇌를 채우는 것 밖에 없었다. 병변에 가까운 나의 의식이 겪었던 포만의 경험은, 고작 선적분을 이해했을 때 우이천 백로의 돋친 좌익(左翼)을 따라 강바닥 방향의 사영이 드리웠던 신비의 체험 뿐이다. 참고로 ‘좌익’ 양자(兩字)의 행간은 참으로 비어있기에, 허깨비가 보인다면 독자 본인 의식의 병변을 의심하라.


이리 해묵은 푸념을 이제사 반추하는 연유가 무엇인가? 그 중압을 이겨낸 것이, 태동은 작년이고 줄탁의 끝이 금년인 까닭이다. 나의 둥지-조직의 관리자를 택한 것은 학업의 중압을 깨고 나를 둘러싼 세상에 대한 처음의 발돋움을 행한 원년이 되고 싶었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병신이라고 손가락질 할 정도로 우습고 과도하게 진지한 나의 결단을 마음껏 욕해도 좋다. 노동도 제대로 못한 세상 물정 모르는 병신이, 덥석 기회를 물어 조직의 맏이가 되었다는 것이 얼마나 우스운 일인가? 나의 의식은 소년성을 버리지 못했지만 위치는 더 이상 그것을 원하지 않는다. 이는 나의 의지에서 아주 멀리 떨어져 발생한 사건이며 관측까지도 꽤나 오랜 시간이 소요되었다.


처음부터 외통수에 걸린 장기를 둔 적이 있는가? 둥지-조직에서 제일 어려웠던 것은 사람이었다. 나이 많은 병신이 처음 본 사람을 대하는 방식은 매우 제한적이었다. 먼저 다가가는 것은 발정난 노견의 간음 시도처럼 폭력적이고 저질스러운 것처럼 보일 수 있었다. 가만히 있는 것은 나이를 헛먹은 맏이의 무책임에서 비롯한 유아퇴행적 행보로 볼 수 있었다. 중도를 찾자면 옆에서 말을 몇 마디씩 거드는 것 뿐이었다. 그것 역시 경직된 조직을 연육시키는데 필요한 양보다 한참 부족했다. 그냥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강간, 유아퇴행 그리고 어중간함 세 개의 선지에서 나의 모든 평판과 인성을 끼워 맞추는 것 뿐이었다. 인생 전부는 과장된 표현이지만, 나의 일생의 대부분을 사실과 다른 부분이 있어도 이를 부정하고 그 틀에 맞춰 나를 보여줘야만 하는 작업이었다.


담을 쌓지 않은 옹성(甕城)을 어떻게 뚫을 것인가? 세계의 어느 명장을 데려와도 이는 불가능할 것이며, 이를 따지기 이전에 애초 이런 ‘골계미’라는 단어로도 포장이 힘든 정신병적인 논제는 어디서 가져왔는지 궁금해질 지경일 것이다. 나의 조직에 그 옹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사적으로 완전히 배타적인 옹성이지만, ‘암덩이’라고 하기에는 타인의 자원을 갈취하지 않으며, ‘반목’이라는 단어를 쓰기에는 공적으로는 열려있는 아주 미묘하고 애매하지만 어디서는 누구든 관측을 할 수 있는 확실하면서도 애매한 무언가 때문에 나를 미치게 만든다. 그것을 고도로 설계하고 만들었는가? 아니면 모르고 만들었는가? 무엇인지는 몰라도 그것은 아마 정신병을 불러오기에 아주 적합한 요소일 것이다. 그 수장(首長)은 고도의 심리전에 능한 명장인가, 아니면 그저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움직인 것에 불과한가? 차일오자(差壹伍者)를 생각하는 매 순간을 자살충동에 부딪히면서 생각을 이어가다 이윽고 “그 수장을 살해하는 것이 어떤가?”라는 생각에 도달한 횟수가 십지(拾指)로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이다. 참고로 ‘살해하는 것’ 오자(五字)의 행간은 참으로 비어있기에, 그 고갱이가 보인다면 내 의식의 병변을 의심하여도 좋다.


이 쯤 되면 나의 처지에 대해서 양지(諒知)하지 않을 수 없다. 육 년의 칩거를 파하고 올라온 양지(陽地)에서 시끄러운 소음만을 양산하는, 동지이든 동지가 아니든 다른 이를 가까이 해야하는 마치 짝짓기에 미친(실제의 욕구와 전혀 일치하지 않으나 강력하게 오해 받는) 꼴을 보여주는, 이제는 타고난 양지(良知)마저 제 손으로 수 없이 해치려고 하다가 결국 별 다른 인상을 남기지 못하고 고꾸라지게 될, 그저 팔랑거리고 파삭거리는 날개 찌꺼기만을 남기고 썩어가는 매미와 내가 다를 것이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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