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생 때, 항상 하교하던 길에서 수상한 무리의 중학생들을 마주쳤다. 5, 6학년도 무서운데 저들은 무려 중학생이다. 잠깐 고민했지만, 설마 그러기야 하겠어? 하고 지나치려 했다. 아니나 다를까, 그들은 나를 불러 세우더니 돈을 쥐여 주었다.
“저기 슈퍼 가서, 아빠 심부름이라 하고 담배 하나 사 와줄래?”
본능적으로 세상 순한 아이를 연기했기 때문일까? 생각보다 말투도 친절하고 은근히 상냥했다. 다만 맡아둔다는 명목으로 가방을 빼앗겨서 꼼짝 없이 슈퍼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한 수 앞을 더 보고 있었다. 역시 중학생이다.
슈퍼로 가서 담배를 달라고 하자, 텔레파시가 통했는지 슈퍼 아저씨가 눈을 부라리며 밖으로 나가셨다. 그 당시 슈퍼 아저씨들의 촉은 무시할 게 못 됐다. CCTV 하나 없이 도둑을 잡아내는 사람들이다. 이윽고 내 가방을 들고 다시 나타난 아저씨는 나더러 집으로 가라고 다그치셨다.
그렇게 풍파 속에서 크다가 연애라는 걸 했다. 그때 만난 사람과 어두운 밤길을 산책하던 중 이런 질문을 받았다.
“저기 앞에 깡패들이 우글우글 있으면 어떡할 거야?”
나는 능글맞은 어투로 대답했다.
“돌아서 가야지.”
깔깔 웃는 그녀를 보고 있으니 정답이었던 모양이다.
유머로 상황을 모면하려는 줄 알았겠지만, 실은 진담도 반이나 섞여 있었다. 지금 생각해도 피할 수 있다면 피하는 게 상책이다.
이것은 본능의 영역이다. 무서움, 더러움, 아픔, 괴로움… 그런 부정적 명사 앞에서 인간이라면 누구나 뒷걸음질을 치게 된다. 100명 중 99명이 그럴 테다.
그런데 단 한 명, 두려움을 마주하는 사람이 있다. 아니, 오히려 두려움 속으로 뛰어드는 게 그들의 사명이다.
이번에 본 영화는 누구보다 용감한 그들의 이야기, 영화 <소방관>이다.
-줄거리
진섭이 사물함 속 옷걸이를 휘어잡고는 등을 푹푹 긁는다. 용태는 그런 진섭을 안쓰럽게 보더니 어렵게 구한 화상 연고를 넌지시 권한다.
“이거 아주 죽이더라구요.”
“야, 야. 여기 손이 안 닿는다. 좀 발라 봐.”
진섭이 용태에게 등을 내민다.
“으이그, 얼마나 긁어댔으면 아주 피떡이네 그냥. 어때요? 죽이지?”
“크으… 어 그래. 허! 죽인다. 허헛!”
마트에서 파는 면장갑과 불이 쉽게 옮겨붙는 방화복. 낮게 배치된 예산으로 마련된 장비는 가연성으로 보인다. 그런 장비에 의존해 불길을 헤매는 게 그들의 일이다. 잠시라도 화마가 덮치면 불이 옮겨붙어 몸 여기저기에 흉터가 남는다. 그들에게 화상 흉터는 이미 일상이 되어 있다.
어느 날 건물에 난 화재로 출동한 구조대는 불법 주차된 차들을 맞닥뜨리고, 진입이 불가능한 상황에 놓인다. 1분 1초가 급한 게 화재다. 대원들은 소방차에서 내려 무거운 장비를 들쳐 메고 화재 현장으로 뛰기 시작한다. 건물 곳곳 불이 안 번진 곳이 없다. 그럼에도 그들은 미처 피하지 못한 요구조자를 찾기 위해 수색을 시작한다.
소방대장은 건물 밖에서 부하들을 지시하던 중, 해당 지역은 도시가스가 아닌 LPG 가스를 쓰는 집이 많다는 보고를 받는다. LPG 가스의 폭발과 함께 건물이 붕괴될 가능성이 있다. 그는 부하들에게 다급히 철수를 명령한다.
하지만 수색 중이던 구조대 반장 진섭은 현장에 놓인 가족사진을 발견하고, 요구조자가 더 있을 가능성을 포착한다. 그는 철수하라는 소방대장의 명령을 무시한 채 수색을 이어 나간다. 그 덕분에 기절해 있는 어린아이를 구할 수 있었지만, 건물 일부가 무너지면서 부하 동료인 용태를 잃고 만다.
신입 구조대원인 철웅은 분노한다. 용태 형이 죽은 건 다 진섭 반장 때문이라고.
“후회 안 해요? 반장님이 명령만 무시하지 않았어도 용태 형, 안 죽었어요.”
반장 진섭은 철웅의 멱살을 움켜쥔다.
“요구조자 목숨 구하려고 내 목숨 바칠 각오 없으면 안 돼. 후회? 그런 거 생각하면 이 일 못 해.”
그러나 내색하지 않을 뿐 진섭도 고통스럽긴 마찬가지이다. 요구조자를 구한 올바른 선택이었을까, 아니면 동료의 목숨을 앗아간 그릇된 선택이었을까. 이미 불에 타버린 건물 앞에서 아들이 좋아했던 반찬을 싸 온 용태의 어머니를 마주치지만, 죄책감에 차마 말을 건네지도 못한다.
진섭의 아내도 자다가 번쩍번쩍 눈을 뜨곤 한다. 혹시나 진섭이 위험한 현장에 가 있진 않을까. 수색 중에 사고라도 난 건 아닐까. 최근 용태의 소식을 들은 후부턴 불안함을 감추기가 힘들다. 살며시 얘기를 꺼내지만 언짢아하는 진섭. 하지만 진섭의 아내는 더욱 눈을 부릅뜬다.
“이젠 사이렌 소리만 들어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아. 용태 삼촌 그렇게 되고… 나도 너무 힘들어… 제발 부탁이야.”
아내의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보고 진섭은 고개를 떨군다. 그는 고심 끝에, 소방관을 그만둘 결심을 한다. 마지막 출근 날. 오랫동안 동고동락한 부하들과, 얼마 전 다퉜던 신입 철웅에게도 시원섭섭한 인사를 건네는 진섭.
출동 경보가 울린다.
-웨에에엥. 홍제동, 홍제동. 상가건물. 홍제동 상가건물 화재 발생.
리뷰를 쓰며 내 이야기를 하자니, 내가 구명 받은 적이 있었던가를 먼저 되짚게 됐다. 아무래도 목숨이 위태로울 정도로 위험한 적은 없었던 것 같다. 그러다 괜히 대학 시절에 배가 너무 아파서 끙끙 앓던 나를 한의원으로 데려간 친구가 떠올랐다.
”동양학이든 서양학이든 아픈 건 똑같이 본다.“
난 판단이 힘들 정도로 아팠고, 친구에겐 확신이 있었다. 의지가 돼서 한의원으로 향했다.
“여긴 그런 거 진료하는 데가 아닌데… 발목 접질리거나 그러면…….”
말끝을 흐리는 원무과 선생님께 인사를 하고 발걸음을 돌렸다. 그렇게 아픈데도 민망함은 느껴졌다. 옆에서 꺼이꺼이 웃고 있는 친구가 보였다. 하지만 한마디 할 힘조차 없었다.
다음날 난 내시경 후, 위궤양을 진단받고 2주간 입원을 했었다.
그 친구는 병문안을 와서도 웃음을 참느라 고생이 많았다. 자꾸 고마운 행동을 그렇지 못한 감정으로 해대니 나로서는 반응하기가 아리송했다. 고마운가 싶다가도 주먹이 불끈 쥐어졌다.
세월이 흘러 친구는 최근 엄마가 되었는데, 조카만큼은 알맞은 병원으로 잘 데리고 다녔으면 좋겠다.
병원을 생각하다 보니 나도 엄마가 생각났다. 초등학교 4학년쯤엔 엄마는 야쿠르트 아줌마였다. 지금처럼 전동식 구르마를 타고 다니는 게 아니라, 앞에 있는 손잡이를 번쩍 들고 커다란 두 바퀴를 굴리면서 통영 시내 여기저기를 다니셨다.
지금 생각하면 길도 험한 촌 동네를 그 커다란 구르마를 끌고 다닌다는 게 보통 힘든 일이 아니셨을 테다. 하지만 어릴 때 난 매일 유제품을 먹을 수 있어서 좋기만 했다. 가끔은 눈치를 살피며 1,000원이나 하는 ‘헬리코박터 윌’에도 손을 가져다 댔다. 그땐 엄마의 눈총보다는 입으로 가져가는 게 더 중요했다.
초등학교에 다닐 땐 정말이지 허구한 날 다쳤다. 입원도 하고, 깁스도 하고, 부러진 뼈도 맞추고, 찢어져서 꿰매기도 하고 그랬다. 원체 내향적인 성격인데 어디서 그렇게 다쳤던지. 엄마는 다친 나를 데리고 병원을 많이 다니셨다.
한번은 체육 시간 때, 누가 더 오래 매달려 있나 승부 같은 걸 했다. 축구 골대에 매달렸는데, 키가 안 닿아서 몇몇 애들이 발을 잡고 올려줬던 것 같다… 내향적이었던 거 맞나? 하여튼 더 이상 못 버티겠어서 팔을 놓고 흙바닥으로 떨어지는데, 사고가 났다. 착지하면서 그만 혀를 깨물고 말았다.
떨어지는 힘 때문에 정말 세게 물었다. 윗니와 아랫니가 부딪히자, 연결된 내 귀에서만큼은 쾅- 하고 큰 소리가 났다. 그 충격 때문인지 아니면 혀를 깨물었다는 정신적 충격 때문인지 이명이 이어졌다. 밥 먹다가 혀를 살짝 깨무는 정도가 아니었다. 피가 정말 많이 나왔다. 머리가 핑 도는 그때 엄마의 목소리가 들렸다.
“철민아~”
저기 은색으로 도색된 철제 담벼락 너머로 엄마가 구르마를 잠시 세워놓고 나를 보고 계셨다. 참 신기하게도 내가 위험할 때, 딱 거기에 계셨다.
내가 아무 말도 못 하자 엄마가 외치셨다.
“왜!”
카랑한 목소리에 울컥하고는 어찌나 눈물이 많이 나던지. 깜짝 놀란 엄마는 그 높은 철제 담벼락을 훌쩍 뛰어넘어서 내게 달려오셨다.
노란 유니폼을 입은 야쿠르트 아줌마가 슈퍼우먼처럼 날아 오셨다.
“보자! 봐봐. 괜찮다. 괜찮아!”
엄마가 다독여주자 마음이 놓여서 눈물이 더 나왔다. 곧장 병원으로 가서 치료를 받고, 한동안 힘겹게 밥을 먹었다.
오래돼서 조금 흐릿하기도 하지만, 놀라셨을 엄마께도 공감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다. 괜찮다고 말하는 엄마는 정작 그렇게 괜찮지가 않으셨을 것 같다. 그때 내 감정과 엄마의 감정을 짐작하면서 이제 와서 먹먹한 기분이 느껴진다. 지금은 연락 한 통도 겨우 드리면서 말이다.
영화와 그렇게까지 관련된 일화는 아닐지도 모르겠다.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다가 여기까지 흘렀다. 다만 소방관들의 숭고한 정신과 부모의 마음은 닮은 구석이 있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영화 <소방관>은 실제 사건인 ‘‘홍제동 방화 사건’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이다. 진섭의 관점에서 줄거리를 썼지만, 영화는 신입 구조대원 ‘철웅’의 관점을 더 이용한다. 신입의 시각을 따라가며 현상을 바라보다 보면 어쩐지 답답한 마음을 느끼게 된다.
예산 부족으로 인한 열악한 근무 환경, 진입을 방해하는 불법 주정차 된 차들, 뻔뻔한 차주, 괜히 들쑤시려는 신문기자. 이런 걸 보고 있으면 눈살이 찌푸려진다.
그러다 영화 중반 용태의 죽음으로 진섭과 철웅이 부딪히는 장면에선, 두 인물 모두에게 공감이 되면서 도덕적 딜레마에 빠지기도 한다. 철웅의 입장에서 무리한 수색으로 동료를 죽게 만든 진섭이, 어린아이의 입장에선 생명의 은인이다.
특히 마지막으로 출동하게 되는 홍제동 화재는 사고가 아니라 방화라는 점에서 정말 화가 났다.
연이은 고구마에 목이 메이지만, 영화에 사이다는 준비돼 있지 않다. 관객의 분노는 끝내 슬픈 감정으로 변모한다. 시원하게 모든 게 해결되는 결말이 아니라 슬픔으로 승화되는 결말을 보면서, 관객들은 생각이 많아진다.
소방관의 처우 개선에 관심을 가지게 되고, 그들에게 주어진 사명과 시민들을 향한 희생정신을 일분 이해하며, 안타까우면서도 감사한 마음을 느낀다.
앞서 <아마존 활명수>를 리뷰할 때, 시나리오가 예측 가능해 아쉬웠단 얘기를 했었다. 그리고 영화 <소방관>도 어쩌면 뻔한 결말을 향해 나아간다고 볼 수 있다. 구조대원들의 기쁜 모습, 행복한 모습이 결말을 암시하는 복선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영화를 보고 나면 진부한 클리셰였음에도 감동이 진하게 남는다.
아이러니하게도 어떤 영화는 뻔해서 평점이 낮고, 어떤 영화는 뻔함에도 평점이 높다. 아마도 영화 <소방관>은 실화를 바탕으로 한 데다 사실적 묘사를 잘 이용한 것 같다. 현실은 사실 영화처럼 극적인 순간보다 답답하고 짜증 나는 순간이 더 많다. 그래서인지 관객들은 영화를 마치 현실인 것처럼 받아들이고, 인물과 배경에도 충분히 이입할 수 있었던 것 같다. 그 덕에 영화 <소방관>은 깊은 울림을 주고 긴 여운을 남기면서, 좋은 평점을 받을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추측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