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보다 더 나은 아이가 되길 바랍니다.
중고등학생 때 한*리 독서논술학원이라는 곳에 다녔습니다. 지금은 유명한 프랜차이즈 학원인데, 당시에는 대입 정시에 논술이 처음 도입되던 시기라 학원도 이제 막 시작하던 단계였던 것 같습니다. 매주 1회 모여서 ‘주인공의 행동에는 어떤 의도가 있는 것일까?’, ‘특정 장면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등 일주일 동안 읽은 특정 작품에 대하여 각자 질문을 하고 대답하며 토론을 하고, 글로도 표현해 보는 수업 내용이었는데요. 그때 한국문학 작품들과 세계문학 작품들을 읽었습니다.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과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 또한 그때 읽었던 책들 중 하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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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당시에는 공감도 못하고 이해도 못 하며, 그러다 보니 당연히 흥미도 못 느껴 의무감으로 읽었어요. 대학 가려면 이런 것들도 읽어봐야 한다는 그런 생각으로요. 분명 읽었던 작품들인데 이제 와서 다시 생각해 보려 해도 도무지 그 내용이 떠오르지 않았던 것은 역시나 당시 제대로 읽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픽사 애니메이션 <인사이드 아웃 2>에 나오는 사춘기의 감정 ‘따분이’가 딱 그때 저를 설명할 수 있는 감정인 것 같아요. ‘뫼르소의 생각과 행동을 지루하게 써놓은 이런 글이 어떻게 노벨문학상을 받을 수 있지?’, ‘도대체 위대한 작가라는 헤르만 헤세는 뭘 얘기하고 싶어서 정신병에 걸린 것 같은 싱클레어의 이런 이야기 따위(?)를 써놓은 것일까?’ 심드렁하고 무관심한 마음이 가득했던 저의 반응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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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어낼 수 있는 힘을 굳이 ‘독서력’이라고 말한다면, 그 힘은 역시 엉덩이 힘에서 나오는 것 같습니다. 처음에는 익숙하지 않고 즉각적인 재미가 없는(?) 이야기라도 묵묵히 앉아서 책을 펼치고 읽어나가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저의 독서력은 뒤늦게 30대가 되어서야 조금씩 몸에 익기 시작한 것 같습니다. 그전에도 책을 읽는 것은 좋아했지만 고전과 문학들을 읽어나가는 뚝심이 부족하다 보니 정보와 지식을 얻는 비문학 작품들을 주로 읽었는데, 흔히 문학과 비문학을 ‘영화’와 ‘다큐멘터리’에 비유하고는 합니다. 문학은 작가의 세계가 담겨있는 영화와 같은 예술인데, 작품을 감상하는 능력이 저에겐 부족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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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력이 좋아지고 엉덩이가 무거워지니 예전에는 지루해서(?)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어내지 못했던 <백범 일지>와 <월든> 같은 책들을 뒤늦게 다시 완독하다 보니 저도 모르게 자신감이 붙었나 봅니다. 아이 책을 고르고 읽어주기 위해 들렸던 서점에서 미니 포켓북 형태의 초판본 문학 전집을 보니 문득 읽고 싶다는 생각을 하여 충동적으로 지난 주말 구입했는데요. 이번에는 단숨에 읽었습니다. 작품에 몰입하고 빠져들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었습니다. 제 자신도 의아했습니다. 일을 하며 10분씩 쉴 때, 점심시간 등 틈새 시간을 이용해 읽었음에도 이야기가 정말 재미있고 다음 내용이 기다려져 참기 힘들 정도였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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뫼르소와 싱클레어의 말과 생각과 행동이 때론 제 자신 같기도 하고, 이해되고 공감되어 인물과 이야기에 푹 빠졌었네요. 다시 만난 <이방인>과 <데미안>, 이제야 제대로 만난 뫼르소와 싱클레어가 반가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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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학원에 같이 다녔던 친구 중에 대구과학고에 갔던 아이가 있었습니다. 기숙사 생활을 하면서도 독서토론논술 학원 수업은 빼먹지 않으려고 매번 학교에서 외출을 허락받아 왔었는데, 그렇게 무리하며 학원 수업에 참석했던 이유가 문학 작품들을 읽고 토론하는 그 수업이 정말 재미있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당시 그 친구를 보며 ’이런 걸 재미있다고 하다니. 정글 같은 학교에서 살아남기에는 너무 모범생 아닌가. 그리고 과학고가 왜 굳이 문학 작품을?‘ 생각하며 ’뜬구름 위에서 살아가는 모범생‘ 정도로 봤었는데요. 지금 생각해 보니 유치하고 생각이 얕았던 저보다 그 친구가 훨씬 세상을 더 잘 이해하고 자신과 타인에 대해 더 깊게 바라보며 공감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런 문학을 즐겼던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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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과 <데미안>은 이제 100년 정도 된 20세기 문학입니다만, 꾸준히 사람들에게 읽히는 작품들로 고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번을 계기로 어릴 때 도전했지만 다 읽지 못했거나, 의무감으로 읽은 탓에 내 것으로 만들지 못했던 고전 작품들을 다시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가장 극복하기 어렵다는 시간과 세월의 힘을 이겨낸 작품들을 감상할 생각에 설레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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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새벽에 즈위프트 자전거를 1시간 조금 넘게 타고, 반포 트랙까지 달리고 왔습니다. 낮에는 아내와 아이랑 함께 화이트보드/칠판 이젤을 구입하려고 이케*에 다녀왔습니다. 그때 그 아빠의 친구처럼 공부를 잘하길 바라는 것은 확률을 예측할 수 없는 도박과도 같은 것이지만, 그때 그 아빠의 친구처럼 아빠보다 이른 시기에 책을 통해 사람과 세상을 바라보고 이해하는 힘을 키우길 바라는 것은 아빠보다 더 나은 아이가 되길 원하는 부모의 욕심입니다. 이건 확률로 따지면 부모 하기 나름 아닐까요? 더 잘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