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우리가 조선의 왕이다. 한양도성을 둘러보자

한양도성 순성길 트레일러닝

by 아이언파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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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가 계획에 여념이 없는 7월이다. 국내외 여행도 좋지만 도심 속 피서는 어떨까? 더위를 피할 뿐만 아니라 서울의 속살 곳곳을 직접 두 발로 답사하며 건강도 챙기고 역사와 문화의 의미까지 담는다면 더욱 좋을 것이다. 서울 한양도성 순성길 둘러보기가 제격이다.


길이 약 18.7km인 한양도성은 600년 수도 서울을 재발견할 수 있는 건축물이다. 봄, 여름, 가을, 겨울 모두 둘러보기 좋지만 도심 한복판 도성길 나들이를 위해 시간 내기란 쉽지 않다. 아침 해가 일찍 뜨는 여름날, 새벽 이른 시간에 시작하면 오전 중으로 한 바퀴 완주가 가능하다. 하루 정도 제대로 날 잡고 단숨에 해치우기(?) 좋은 코스다. 답사를 마치고 식사와 간식으로 마무리하면 더욱 즐겁다. 러닝과 함께 산과 비포장길을 달리는 트레일 러닝 또한 인기가 뜨겁다. 한양도성 순성길이야말로 적당한 코스이다. 달리기가 부담스럽다면 걸어서 둘러봐도 좋은 곳이다. 트레일 러닝이 익숙하다면 3시간 이내, 익숙하지 않더라도 5시간 정도면 충분하다. 걸어서 둘러보더라도 한나절이면 가능하다.


한양도성은 도성 안 4개의 산인 내사산, 즉 백악산, 낙타산, 목멱산, 인왕산을 이어 울타리처럼 만든 자연친화적인 성곽이다. 세계적으로 도시를 둘러싼 성곽은 있지만 한양도성처럼 온전히 남아 있는 경우는 드물다. 도시가 팽창하며 성곽은 개발을 방해하는 장애물이었고, 도시 발달을 위해 헐렸다. 중국의 베이징은 성곽을 헐어 길을 내었다. 인구 기준 세계에서 가장 큰 도시 중 하나였던 에도(도쿄) 또한 성곽 대신 물길로 도시 방어와 경계를 삼았지만, 물길은 메워졌고 경계를 이루던 방어시설도 대부분 사라졌다. 뉴욕의 월스트리트는 ‘성곽길’이라는 뜻이다. 성곽이 있던 자리에 길을 냈던 것이다.


서울의 한양도성은 전체 18.7km 중 13km 정도의 성곽이 남아있다. 평지나 강 하구에 지어진 베이징, 도쿄 등과 달리, 서울은 애당초 터를 잡을 때부터 산의 지형을 중시한 덕분이다. 우리의 서울에는 궁궐, 종묘사직, 왕릉 등 많은 문화재가 남아 있지만 단일 문화유산으로 600년간 지속된 것은 한양도성이 유일하다. 우리가 사는 터전의 역사와 내력을 더 깊게 이해하기 위해 한양도성을 한 번 둘러보자. 출발지는 남산이다.


한양도성 순성길은 말 그대로 4대문, 4소문을 연결한 도성을 따라 한 바퀴를 도는 길이기 때문에 시계 방향도 가능하고 시계 반대 방향으로도 진행 가능하다. 주차와 교통 등으로 일행과 함께 남산 국립극장에서 출발하였다. 시계 방향으로 간다면 먼저 남산 오르막길을 올라 N타워를 넘어가고, 숭례문을 거쳐 인왕산과 북악산을 지나 낙산과 장충단을 거쳐 복귀한다. 처음이 힘들지만 마지막이 수월하다. 시계 반대 방향이라면 먼저 장충단 방향으로 내려가고 야트막한 낙산을 지나 북악산과 인왕산을 오르내린 다음 마지막으로 남산을 넘어와야 한다. 처음은 쉽지만 마지막이 힘들다. 체력이 충분한 초반에 남산을 넘고 후반을 쉬운 코스로 가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였다. 일행 중 한 명은 이것을 표현하길, "시계 방향은 처음에 저축하고 나중에 신나게 돈 쓰는 느낌이지만, 반시계 방향은 처음에 신나게 쓰고 나중에 빚 갚는 느낌이다"라고 하였다. 무릎을 탁 치는 말이었다. 시계 방향으로 가더라도 개인 운동 능력에 따라 끝까지 저축만 하다가 끝날 수도 있다.


국립극장 앞에서 남산 버스 코스를 따라 조금 올라가면 성곽 옆 설치되어 있는 계단을 만난다. 부지런히 계단을 올라가면 각양각색인 성곽돌을 볼 수 있다. 축성과 보수 시기에 따라 그 크기와 모양이 다르다.

태조와 세종 시기는 전국 각지에서 대대적으로 백성들을 동원하여 축성하고 보수하였다. 자연석을 이용하거나 화강암을 장방형으로 다듬는 식으로 작업이 진행되어 아랫돌은 크기가 크고 올라갈수록 점점 작은 돌을 차례로 쌓았다. 틈이 벌어진 곳은 간격과 모양에 맞춰 돌을 다듬고 끼워서 쌓는 식이다.


반면 숙종 대에 이르러서는 노역 체계가 바뀌었다. 더 이상 대규모 요역은 어려웠고 군인 또는 숙련공에 의해 작업이 이루어졌다. 축성 인력이 전문화되며 기술도 고도화되었다. 덕분에 정방형의 일정한 모양으로 네모 반듯하게 깎인 성곽돌로 만들어졌다. 똑같은 구간의 성곽이라도 시대별로 상황에 따라 모양이 다르게 개보수된 것을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성곽을 따라 계단과 경사 길을 오르고 남산 정상에 다다르면 N타워와 팔각정이 기다린다. 남산 팔각정은 처음 세워졌던 1959년 당시 이승만 대통령이 본인의 호를 따라 ‘우남정’이라는 이름으로 세웠지만 4.19 혁명 때 철거되었다. 지금의 팔각정은 이후 다시 지어진 것이다. 조선의 국사당이 있던 곳이다. 한양도성을 만들 당시 백악(북악산)의 산신은 진국백으로 삼고 남산(목멱산)의 산신은 목멱대왕으로 삼아 제사를 올리고 도성을 축성하였다. 목멱산 국사당은 기우제, 기청제 등을 거행하는 장소로도 사용되었다. 1925년 조선신궁이 만들어지고 처지가 변하였다. 조선총독부 입장에서 신궁보다 더 높은 곳에 있던 무속 공간인 국사당이 못마땅했을 것이다. 방화와 도둑 등 크고 작은 사건이 이어지더니 결국 국사당은 인왕산 선바위 인근으로 위치를 옮기게 되었다.

아직 갈 길이 멀다. 남산 정상에서 숨 돌릴 틈 없이 조선신궁이 있던 자리인, 안중근의사기념관, 백범 광장 방향으로 계단을 내려간다.


드라마 촬영지로 유명한 ’삼순이’ 계단이 있는 곳까지 내려오면 광장처럼 넓은 공간이 나온다. 현재는 주차장으로 사용되고 있는 곳으로 이곳에 한양도성 유적 전시관과 안중근의사기념관이 있다. 그리고 이곳은 영화 <파묘>에도 나왔던 ‘조선신궁‘이 있던 자리이다.

신궁의 설계는 메이지신궁을 설계한 이토 추타가 담당하였다. 이세신궁 건축양식인 신메이츠쿠리 양식을 변형하여 조선신궁에 적용하였다고 한다. 안중근의사기념관과 서울시 교육청 교육연구정보원이 있는 터가 상광장, 계단과 경사로 아래 위치한 백범 광장이 중광장, 성곽길을 따라 더 내려가면 만날 수 있는, 예전 힐튼 호텔 앞 삼거리가 하광장이었다.


조선신궁은 민간 신사가 아닌, 국가 의례를 거행하고 일왕이 직접 사신을 보내는 ’칙제사‘였다. 1920년대 일본의 칙제사는 본토에도 16곳밖에 없었고 식민지에서는 조선신궁이 유일했다고 한다. 조선신궁에서 모시는 신은 일본 열도의 시조신으로 일컬어지는 아마테라스 오미카미와 메이지 천황이었다.


일본 고대 역사서인 <일본서기>에 따르면 아마테라스의 동생 스사노오(폭풍의 신)는 난폭한 행동으로 열도에서 쫓겨난다. 일본의 식민사학자들은 스사노오가 건너간 곳이 한반도 남부이고 이 세력이 한반도를 지배했다고 주장하였다. 임나일본부설과 연결된다. 여기서 더 나아가 스사노오가 바로 <삼국유사>의 단군이라 주장하였다. 일본 시조신의 동생이 고대 한반도의 지배자였고 원래 일본과 한국은 형제와도 같으니 한일강제병합은 자연스럽다는 논리이다. 또한 형제의 재회를 가능하게 한 강제병합 공로자는 메이지 일왕이라는 것이다. 아마테라스와 메이지 일왕은 일본 식민주의 대원칙인 동화정책의 핵심 상징과도 같았다.


조선신궁은 일본 제국의 이데올로기를 전파하는 중요 시설로 유지되었다. 1945년 8월 일제는 전쟁에서 패망한 뒤 ‘승신식‘이라는 명목으로 신궁에 불을 지르고 달아났다. 한국인들에 의해 신궁이 파괴되는 것을 꺼렸던 이유이다.

안중근의사기념관 맞은편의 서울시 교육청 교육연구정보원 건물은 처음에 어린이 회관이었다. 1970년 건립된 시설이고 육영수 여사의 휘호가 새겨진 머릿돌을 지금도 볼 수 있다. 1974년 어린이 회관이 이전되고 이 건물은 국립 중앙도서관으로 쓰였다. 1988년 국립 중앙도서관이 반포로 이전한 후에는 서울과학교육원으로 바뀌었다.

조선신궁 상광장인 안중근의사기념관과 중광장이었던 백범 광장, 그리고 하광장인 예전 힐튼호텔 건물 앞 삼거리로 내려가는 길은 한양도성 순성길에서 가장 아름다운 구간 중 하나이다. 잠깐 멈춰 서서 사진을 찍고 먹을거리를 챙기며 숨을 돌리고 다음 여정을 이어가자.

도성길을 따라 내려오면 국보 1호 숭례문과 만난다.

숭례문은 한양도성의 4대문, 4소문 가운데 가장 중요한 문이다. 경복궁의 남쪽 문으로 도성의 관문과도 같았다. 문루는 정면 5칸, 측면 2칸의 2층 건물이고 지붕 양식은 우진각지붕으로 생김새뿐만 아니라 규모에서도 현존 성문 건물 중 가장 크다.


조선 왕조는 다섯 가지 기본 이념(인의예지신)을 각 성문의 현판에 새기고 생활 속에서 이를 실천하도록 하였다. 인, 의, 예, 지는 4대문인 흥인문, 돈의문, 숭례문, 소지문(숙정문의 옛 이름이라는 설이 있다)에, 그리고 신은 보신각에 넣었던 것이다. 이 네 가지가 없는 사람을 ‘사(4)가지 없는 놈‘이라 하였다. 세월 속 백성들의 생활 풍파를 거치며 ‘싸가지 없는 놈‘이라는 언어로 자리 잡았다. 사람들은 도성 안팎을 드나들기 위해 인의예지를 읽으며 성문을 통과하였다. 평생교육인 셈이다. ’숭례’는 예를 숭상한다는 의미로 <중용>의 글에서 가져왔다.


모양도 멋들어지고 깊은 의미의 이름을 가진 숭례문이 도심 속 큰 도로 한가운데 섬처럼 남게 된 데에는 사연이 있다.


초대 통감 이토 히로부미 부임 이후 조선을 실질적으로 병탄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일본은 요시히토 황태자의 방한을 추진한다. 경호상 이유로 황태자 방한 일정에 맞춰 숭례문 좌우 성벽을 헐어내야 한다는 주장을 하였다. 일본인들은 성벽처리위원회라는 기구를 설치하고 1907년 10월 숭례문의 좌우 성벽을 철거하여 폭 8칸의 도로를 만들었다. 숭례문과 경성역(서울역)을 잇는 도로를 1910년에 대대적으로 정비하였다. 서울의 관문은 숭례문을 대신하여 근대 교통수단인 철도가 닿는 경성역으로 이동하였다.


도로를 건너 성곽길을 따라 이동한다. 소의문 터를 지나 돈의문 터 방향으로 달린다. 소의문은 한양도성 서쪽의 소문이라 하여 서소문이라 하였다. 1914년 일제강점기에 가장 먼저 없어진 성문이다. 서쪽의 대문인 돈의문 또한 1915년 경인선 전철 복선화를 위해 헐렸다. 강북삼성병원 옆 돈의문 역사박물관이 옛 성문의 흔적을 말해주고 있다. 소의문은 도성 밖으로 상여가 나가는 소문, 시구문이라 하였다. 또한 중죄인을 처형하는 형장이었다. 서소문 밖 네거리는 천주교인 44명이 순교한 한국 최대 순교성지 중 하나이다. 서소문동에는 서소문이 없고 서대문구에는 서대문이 없다. 언젠가 복원이 이루어져 우리 곁에 다시 돌아오길 바랄 뿐이다.


경희궁과 사직단을 지나 인왕산으로 진입한다. 오래전 한양 도성의 경계가 여기서 결정되었다. 무학대사와 정도전 사이 논쟁이 벌어졌다. 무학대사는 인왕산 선바위가 도성 안에 있어야 한다 주장했지만 정도전은 ’숭유억불‘을 위해 도성 밖에 두길 바랐다. 결국 인왕산 선바위는 한양도성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였다.


인왕산은 보기와 다르게 험준한 바위산이다. 정상에 다다르기 위해서는 때로는 손과 팔까지 사용하여 사족보행으로 올라가야 하는 구간도 있다. 꾸준히 걷고 뛰고 기어서 정상에 오르면 서울 시내가 한눈에 보인다. 청와대와 경복궁, 도심의 빌딩 숲이 이루는 풍경을 감상하니 오랜 수도 서울의 아름다움을 새삼 실감하게 된다.

인왕산을 내려와 백악(북악산)을 오르기 전, 4소문 중 북소문인 창의문을 만난다. 북대문인 깊은 산속 숙정문은 풍수지리 등의 이유로 항상 굳게 닫혀 있었기 때문에 창의문이 실질적으로 북문 역할을 하였다. 자하동에 있어 자하문이라 불리기도 하였다. ‘자하’는 부처의 몸에서 나오는 보랏빛 금색 안개라는 의미이다. 새벽 물줄기에 비친 이곳 물 안개가 자줏빛처럼 아름다워 자하라 불렸고, 자하문을 줄여 자문이라고도 하였다. 유홍준 작가님이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서 언급했던 ’자문 밖 풍경’의 그 자문이다.

이제 백악산이다. 도성 북쪽에 있어 북악산이라 하였다. 한양도성 순성길 백악산 구간은 소실된 부분이 적어 성곽의 옛 모습을 가장 많이 간직하고 있다.


한양도성 내사산은 북현무 백악산, 좌청룡 낙타산(낙산), 우백호 인왕산, 남주작 목멱산이다. 백악산은 한양의 주산으로 기우제와 산신제를 지냈던 산이다.

가파른 계단길을 오르내리면 어느덧 4대문의 북문인 숙정문에 도착한다. 숙정문은 한양도성 성문 중 좌우 양쪽 성벽이 연결되어 있는 유일한 문이라고 한다. 깊은 산속에 있어 길이 험하고 인적 또한 드물다. 음양오행 중 물을 상징하여 평소에는 굳게 닫혀있고, 가뭄이 들 때 열었다고 한다. 백악의 봉우리를 넘어왔던 우리는 숙정문의 시원한 그늘에서 잠깐 휴식하고, 혜화문과 낙산을 향해 다시 발걸음을 옮긴다.


혜화문은 한양도성 동쪽의 소문이다. 현재 혜화문은 100년 전 전차로 소실된 문루와 성문을 옮겨 지은 것이다. 순성길을 뛰어가다 보면 길 옆 너무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어 좀처럼 직접 올라가 보기 쉽지 않다. 저 멀리 높은 곳에 위치한 혜화문을 바라보며 큰 길 건너 낙산으로 향한다.

낙산은 즐거울 낙이 아닌 낙타의 낙이다. 백악산에서 바라본 산 모양이 낙타의 등처럼 보인다고 하여 이름 붙였다. 우리나라에도 낙타가 있었다. 고려 시대 거란인들은 낙타를 타고, 낙타에 짐을 실어 예성강 무역항에 나타났다고 한다. 연암 박지원도 <열하일기>에서 낙타를 묘사하길 ’머리는 말처럼 생겼고 눈은 양과 같으며 꼬리를 소와 같다. 걸을 때에는 목을 움츠리고 그 모습이 마치 백로와 같다. 무릎은 두 마디, 발굽은 둘로 갈라져 걸음걸이는 학 같고, 거위와 같은 소리를 지른다‘고 하였다.


낙산은 낮은 산이다. 인왕과 백악을 오르내리며 지친 몸으로도 힘들지 않게 가벼운 마음으로 달리거나 걷기 좋은 길이다. 낙산의 정상 부근에 오르면 저녁 석양을 감상할 수 있는 전망대가 있다. 겸재 정선은 낙산에서 저 멀리 인왕산 너머 서해의 석양을 화폭에 담곤 하였다. 잠시나마 정선의 마음으로 서울 경치를 바라보기 좋은 산이다.


낙산을 내려가면 동대문인 흥인지문과 예전 경성운동장(동대문운동장) 터에 세워진 동대문디지털플라자(DDP) 건물을 마주하게 된다.

한양도성 순성길 DDP 구간을 달리다 보면 쉽게 발견하기 어려운 곳에 이간수문이 숨어 있다. 건물 한쪽 편 지하공간 같은 곳에 가려져 있다. 1925년 일제 강점기 경성운동장 건설로 땅속에 파묻혀버린 이간수문은 DDP가 지어질 때 다시 드러났다. 도성 안 물을 도성 밖으로 보내는 수문이었다. 숨은 그림 찾듯 이간수문 모습을 눈에 담고 DDP를 가로지르며 달려간다.


동대문운동장이라는 이름으로 익숙한 경성운동장은 흥인지문 동쪽 2만 2천 평 면적에 세워진 종합경기장이었다. 제대로 된 경기장 시설이 없어 대도시에 어울리는 공설운동장을 만들어야 한다는 여론이 높아지던 때, 조선총독부는 일본 황태자(히로히토 일왕) 결혼을 기념하여 운동장 건립을 결정하였다. 육상경기장, 야구장, 정구장 등을 갖춰 당시 일본 본토를 포함해 일본 제국 전체 두 번째 규모였다고 한다.


조선신궁 건립과 진좌제의 일정에 맞춰 지어졌다. 조선신궁의 제신에 바치는 경기 대회가 신축 경성운동장에서 거행되었다. 1925년 9월 30일 준공한 경성역에 첫 열차가 들어온 것은 10월 13일이었다. 첫 열차에는 도쿄에서 출발한 조선신궁읜 ‘신체’가 실려 있었다. 이틀 뒤 경성운동장 낙성이 이루어지고 개장식 또한 신도 의식에 따라 진행되었다. 이튿날부터 3일 동안 ‘조선신궁 경기 대회‘ 열렸다. 조선신궁 경기 대회는 매년 개최되었다.


지금의 DDP 건물은 2004년 프리츠커 상 수상자인 자하 하디드가 설계에 참여한 것으로 2009년에 착공하여 2014년 3월에 개관하였다. 45,000장의 알루미늄 패널 외관으로 만들어져 멀리서 보면 마치 영화 속 외계인의 우주선이 착륙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서울마라톤 풀코스 구간에 포함된 곳이다. 대회 코스 중 유일하게 반대편 선수들과 마주칠 수 있는 반환점이기 때문에 서로 응원하고 인사를 나눌 수 있는 곳으로 마라토너들에게는 더욱 친숙한 공간이다.


한양도성 순성길 표지판을 따라 길을 건너고 계속 달리면 퇴계로의 광희문을 지나게 된다. 남쪽의 소문, 남소문이다. 도성 순성길의 막바지이지만 쉬어갈 겸 근처 편의점에서 물이나 먹을 것들을 보충해 주는 것도 좋다. 광희문 앞에서 왼쪽으로 꺾어 이제 다시 남산 방향 장충단으로 오른다.


장충단은 조선 말기, 대한제국의 국립현충원과 같은 곳이다. 을미사변에서 희생된 궁내부 대신 이경직과 훈련대장 홍계훈 이하 장병 등을 기리는 장소였다. 일본 제국은 식민지의 충절과 추모 공간을 그대로 놔둘 수 없었다. 1909년 10월 15일 제향을 마지막으로 장충단 제사는 중단되었고, 같은 해 11월 이토 히로부미의 장례를 치렀다. 기존의 장충단은 지금의 신라호텔과 국립극장까지 이르는 넓은 곳이었지만 일제는 남산 둘레를 따라 신작로를 만들어 수천 그루의 벚꽃나무를 심은 다음 '남산순환도로'라는 이름을 붙이고, 연못, 놀이터 등을 지어 행락지로 만들었다. 또한 단이 있던 부지는 기존 건물을 헐고 이토 히로부미(한자명 이등 박문)를 기리는 사찰인 박문사를 1932년에 세웠다. 지금의 신라호텔 자리이다. 박문사를 지을 당시 일제는 광화문의 석축과 선원전 전각을 해체하여 재료로 사용하였고, 경희궁 흥화문을 옮겨와 정문으로 만들었다. 흥화문은 이후 신라호텔의 입구로도 사용되다가 다시 경희궁으로 제자리를 찾아 돌아갔고, 현재 신라호텔에는 영빈관 현판이 걸린 모조문이 세워져 있다.

장충단에서 다시 언덕을 올라 국립극장으로 되돌아가는 길은 오르막이지만 크게 힘들지 않다. 드디어 순성길의 끝이 보이기 때문이다. 완만하고 가파른 경사가 반복되는 오르막에 '다산성곽도서관'이 보인다. 주차장이 협소하고 언덕 위에 위치해 있어 접근이 쉽지 않지만 도서관 분위기가 워낙 좋은 데다 아이들 책도 잘 구비되어 있어 가족과 함께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책을 읽을 수 있는 곳이다.


도서관을 지나 성곽을 따라 골목길 같은 계단으로 올라간다. 호텔리조트 건물과 테니스장을 통과하면 처음 출발했던 국립극장에 도착한다. 한양도성 성곽은 약 18.7km로 알려져 있다. 순성길을 달리면 큰 도로에서는 횡단보도로 우회하고, 절벽이나 경사 구간에서는 주택가나 샛길로 돌아가기 때문에 실제 거리는 20km 내외이다. 걷는 것도 좋지만 평지나 오르막에서는 가볍게 뛰어가는 것도 좋다. 걷는 것과 뛰는 것은 서로 다른 운동이다. 무겁고 투박한 등산화보다 가볍고 미끄러지지 않는 트레일 러닝화가 제격이다. 흙과 돌을 밟는 산길도 많지만 도심 구간 또한 자주 나타난다. 순성길 고비마다 나타나는 편의점에서 물과 먹을 것은 언제든 살 수 있으니 주머니와 가방은 가벼워도 된다.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제47차 세계유산위원회에서 울산 반구대 암각화, 북한의 금강산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난 7월 13일 등재되었다. 안타깝게도 한양도성은 예전에 시도했지만 아직 등재되지 않았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한양도성은 어디 내놓아도 손색없는 자랑스러운 우리의 역사 유적이다. 많은 이들의 관심과 사랑으로 보존과 복원이 이루어져 세계의 문화유산으로 인정받길 바라는 마음으로 이번 여름 한양도성 순성길을 달려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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