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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 로소 Mar 30. 2021

1-2. 엄마와의 대화를 거부하는 이유[수정02.08]

나의 벽장 소년에게


나는 우리 가족을 꽤 사랑한다. 특히 내 어머니를 가슴 아플정도로 절절하게 사랑했다.


의정부 집에서 나오던 날은 몇 안 되는 생생한 어릴적 기억이다. 엄마와 새아버지가 큰 소리를 내며 싸우고 있었고 이내 외할머니와 작은 외삼촌이 도착했다. 여섯 살의 나와 한 살도 안 된 동생이 작은 외삼촌 차로 보내졌다. 나는 고사리 손으로 동생을 감싼 포대기를 꼭 감싸 안았다. 그 갓난아기의 온기가 퍽 의지가 되었던 것 같다. 이 무서운 상황이 어서 끝나기를, 빌고 또 빌었던 것 같다.


그렇게 두 번째 아버지와 이혼한 후, 우리는 외가댁에서 살았다. 정확히는 큰외삼촌 댁이었다. 그 집 대문 안에는 두 채의 집이 있었다. 안채에는 집주인 할머니가 노모를 모시고 살았고, 길고 좁다란 구조의 바깥채에는 외할머니와 큰외삼촌네 네 식구가 살고 있었다. 그 중 우리는 안채의 작은 방 한 칸에 세 들어 살게 되었다. 단칸방으로 들어가던 날의 기억은 거의 없다. 신발장이 굉장히 크다고 생각했던 것 정도일까.


그 이후, 엄마 옆에 있을 때면 나는 제 나이보다 훨씬 더 어린 응석받이가 되었다. 부모 두 사람 중 한 명을 잃은 아이는 다른 한 쪽에게 매달리기 마련이다. 어디를 가서도 엄마의 옷깃을 붙잡고 떨어지지 못 했다. 심지어는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엄마 귀에 속삭이곤, 내가 민망하게 않게 전달해주길 기다렸다. 엄마 없이는 말도 제대로 못하는 아이. 그렇게 몹시도 엄마에게 의지했다. 의지하면 의지할 수록 더 의지해야 했기에, 엄마는 나의 전부가 되었다. 하루종일 야근하는 엄마를 목빠지게 기다리며, 그 얼굴이나 손길을 갈구했다.


그러나 막상 하루 대부분의 시간은 혼자 해내야하는 것들이 너무 많았다. 학교가 끝나고 돌아와서 라면을 끓여 먹거나, 숙제를 하거나, 동생을 챙기는 것들이었다. 그중 가장 큰 일은 외로움을 견뎌내는 것이었다. 돌봄 받지 못하는 처지를 감내해야하는 것. 그럴 수록 엄마는 나에게 더 중요해졌다. 엄마와 떨어져 있던 만큼, 엄마와 함께 있을 때면 더 종종거리며 엄마와 붙어있으려 했다. 그렇게 나는 마치 식물처럼 엄마가 주는 모든 것을 가만히 받아들이는 아이가 되었다. 딱히 거절하는 법도, 이유도 몰랐다.


엄마를 버티게 하는 건 악바리 같은 자존심과 처절한 자기연민, 그리고 두 아이였다.


"너희 둘 데려오려고 나머지는 다 포기했어."


양육권 하나만 바라보고 위자료 한 푼 받지 않은 채 이혼한 엄마는 가장이 되었다. 당신의 삶을 포기하고 자식들만 바라보며 했던 선택은 틀리면 안 되었다. 혼자서 두 아이를 키워내야 하는 자신의 처지가 애처로웠다. 내 아이들만은 번듯하게 키워낼 것이라는 악착 같은 자존심만이 엄마를 버티게 했다. 그런 마음이 똘똘 뭉친 것이 내 어머니였다.


특히 엄마의 자존심은 '외모'로 표출되었다. 아빠를 만나기 전에 남자들에게 인기 꽤나 있었다는 자랑을 꽤 자주했다. 고르고 골라 시집 간 게 너네 아빠라는 한탄도 더해서. 아름답던 전성기에 대한 매련인지, 엄마는 집앞 슈퍼 조차도 편한 차림으로 가지 않았다. 환갑이 지난 지금까지도 어깨까지 내려오는 노란색 펌 스타일을 포기하지 않는다. 매우 비용이 많이 드는 스타일이다. 여웃돈이 생기면 옷과 신발, 화장품을 사는데에 썼다. 당신의 외모 뿐만 아니라 자식들의 외형도 중요했다. 특히 첫 째에 여자 아이였던 나는 더더욱 그랬다. 없는 형편에 늘 브랜드 유아동복을 사입힌 것이 엄마의 큰 자랑이었다.


초등학교 고학년 무렵, 한 번은 내가 버스를 타고 시내에 놀러 나갔다가 걸어서 돌아온 적이 있다. 버스로 20분이면 될 거리를 한두 시간 걸려 걸어왔다. 한겨울이었다. 중간중간에 추위를 피하려 농지의 천막같은 곳에 몸을 숨겼다. 없는 형편에 제법 비쌌던 코트가 엉망이 되는 줄도 몰랐다. 엄마의 선물을 사다가 버스비까지 써버렸지만, 엄마의 기뻐할 얼굴을 상상하면 그 춥고 위험한 길 조차 신나는 여정이었다. 딱 그맘때 아이들이 하는 모험 놀이 같은 거였다.


"누가 이딴 거 사달래?"


고심해서 골랐던 작은 보석 상자는 주인의 손에 의해 바닥에 내동댕이 쳐졌다. 값싼 나무로 만든 그 물건이 힘없이 부서졌을 때의 상실감을 나는 도저히 잊을 수 없다. 나의 진심 같은 것보다, 그 어린 아이가 엄마를 얼마나 생각했는지보다, 그 소박하고 귀한 사랑보다, 엄마에겐 중요한 게 있었다. 이를테면 그녀의 자존심과도 같은 나의 외형, 그 ’값비싼 코트‘ 말이다.


방 안에 매일 같이 틀어져있던 만화영화의 소음을 기억한다. 비디오 가게에 들러 디즈니 테이프를 빌려 한 없이 돌려보던 기억도. 거기에는 사랑받는 아이들이 많이 나온다. 가족의 사랑, 연인의 사랑, 친구의 사랑, 인류의 사랑이 모두 나온다. 현실 세계의 사랑은 만화와는 조금 달랐다. 현실의 사랑은 돈과 관련이 많았다. 엄마의 사랑도 그랬다. 내게 옷을 사주고, 맛있는 먹을거리를 사주고, 같이 쇼핑을 할 때 나는 엄마에게 사랑받는다 느꼈지만 집으로 돌아오면 모든 게 허무했다. 그래도 나는 그것이 사랑이라고 알았어야만 했다.


채워지지 않는 지독한 외로움이 아빠가 없는 편모가정이라서 느끼는 것이리라 믿고 싶었는지도. 눈 앞에 없는 아빠를 원망하면 편하니까. 하지만 알아버렸다. 당신의 눈 속에는 내가 없다. 엄마는 내 눈 속에 비친 자신을 보고 있다. 이런 식이면 아무도, 진짜로 나를 보는 사람은 없겠다. 그러면 나는 존재하는 게 맞나? 나는 어떤 이의 외로움을 달래고, 감정을 해소하고, 노후를 책임지기 위해 태어난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생각하면 나는 그만 눈을 감고 싶어진다. 당신에게도 감정이란 게 있고 그것이 나를 힘들게 하지만, 당신은 정작 스스로의 마음을 돌볼 줄 모른다. 그러니까 자연스럽게 타인의 마음에도 마음을 쓸 줄 모른다. 인간에게 마음 외에 무엇이 중요한가? 나는 잘 모르겠다. 마음이 없으면 삶의 진작에 포기해도 되는 것이었다. 효율성이 떨어져도 너무 떨어지니까.


계단 밑 벽장에서 해리포터가 느꼈을 외로움을 상상해본다. 존재적 외로움을. 그래서 나는 십대 시절 블로그 제목을 이렇게 지었다.


“나를 구해줄 판타지가 필요해”


그 판타지 세계에서는 누군가 나의 외로움을 뿌리부터 사라지게 만들어 줄 것만 같아서. 마법이 아니고서는 힘들 것 같아서.


엄마가 부숴버린 보석 상자는 여전히 ‘나의 마음이 짓밟혔던 기억의 상징물‘로 남았다. 나의 진심을 짓밟힌 사람이 누구의 진심을 지켜줄 수 있을까? 나의 마음이 짓밟히기 전에 지키지 못한 것은 엄마가 너무 소중했기 때문에. 엄마를 사랑했기 때문에. 그래서 나는 지금도 누군가에게 진심을 주는 게 그토록 두려운가? 내가 무방비해질 걸 알기에.


‘순수한 마음을 짓밟은 사람는 벌을 받아야 하지 않나?’ 어쩌면 그렇게 생각하는 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이토록 엄마를 미워하는 거라면, 차라리 납득은 가겠다.


그래도 어쩌면 한참, 한참 후에 내 마음이 다시 소생한다면… 나도 누군가의 마음을 지켜줄 수 있게 될까? 벽장소년처럼 나의 마음에도 그런 힘의 씨앗이 존재할까? 궁금해지며, 제발 그럴 수 있기를 빌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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