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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ndaleena Sep 07. 2017

환상이라는 이름의 이중성에 대하여

사적인 영화일기, 라라랜드

* 영화에 대한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 이미지 출처: 영화 <라라랜드>



사적인 영화일기, <라라랜드>


<라라랜드>와 감독의 전작 <위플래시>는 겹치는 구석을 찾기 힘들다. 닮고 싶은 것인지 닮아야 하는 것인지, 따라야 하는 것인지 따를 것인지 정신을 붕괴시키는 독재자가 등장하지 않기 때문일까. 단연코 휘두르고 휘둘리는 고통은 없었다. 그저 나는 러닝 타임 내내 단지 제삼자, 철저히 관객으로서 그 자리를 지켰다. 

     두 영화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꿈을 이야기한다. <위플래시>는 공감의 영역이 현저히 얕고 좁을 수밖에 없는 소년을 주인공으로 한다. 하지만 왜인지, 우리는 파괴되는 '앤드류'를 눈과 귀와 피부로 생생히 느낄 수 있었다. 시큼한 땀 냄새가 코끝을 자극하고, 살점이 떨어져 나간 양손이 신경을 긁어대며 고통을 호소한다. 지독히도 육체적으로 다가오는 앤드류의 꿈은 속절없이 영화 속으로 제삼자를 끌어들인다. 


     반면 <라라랜드>는 공감의 영역이 넓은 두 인물을 전면에 세운다. '미아'는 6년째 한 우물만 파는 취업준비생이고 '세바스찬'은 갚아야 할 온갖 대출금이 잔뜩 쌓여 있는 창업준비생인 셈이다. 확실히 앤드류보다는 미아와 세바스찬에게서 자신을 발견하는 것이 수월하다.

     그러나 <라라랜드>는 현실과 거리감을 두는 진행 방식을 택했다. 꿈과 환상의 공간 '라라랜드'라는 전제는 "열일 제쳐두고 우리 라라랜드로 들어가 봅시다. 보여주고 싶은 게 많아요"라고 말하며 관객을 매혹시킬 준비를 마쳤다. 형형색색의 채도 높은 원색을 듬뿍 입은 화면, 풍만하고 흥겨운 재즈 리듬을 기반으로 시작하는 이 이야기는 분명 흥겹다. 우리는 그저 객석에 앉아 고개를 약간 치켜들고 마치 한 편의 연극 같은, 동화 같은 이 영화의 환상을 누리면 그만이었다.





꿈의 나라, 비현실적인 세계  


혹자는 말한다. 불가능이 가진 낭만은 큰 울림을 남기는 법이라고. 막연한 꿈, 이뤄질 수 없는 사랑 같은 것들 말이다. 영화는 이 법칙을 수용한 것처럼 보인다. 뒤죽박죽 뒤엉켜 전개되는 환상은 '만약 그랬다면 좋았을 텐데'라는 잔상의 엔딩을 만들었다. 꿈과 현실의 경계를 무너뜨려 달콤한 환상의 여운을 남긴다. 화려한 색감과 풍성한 음악에 적절한 마법까지 더해졌다. 우리는 비극보다는 여운에, 슬픔보다는 아름다움에 기울어지기 쉬워졌다.

     그러나 만약은 결국 만약일 뿐이다. 실현될 수 없는 상상은 현실의 매몰참을 가중시킨다. <라라랜드>의 엔딩은 뒤틀려 있고, 이 뒤틀린 엔딩은 분명 영화가 가진 매력이다. 시종일관 뜬구름만 잡는 것 같은 이야기에 한 방울 두 방울 스며든 현실성이 어느새인가 우위를 차지하고, 그 씁쓸함은 배가 된다. 

     감독의 재능은 공연과 영화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들었다. 현란하고 아름답고 섬세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라랜드>는 극적으로 표현하자면 '동화책으로 머리를 세게 두드려 맞는 기분'은 선사하지 못했다. 모든 기교를 떠난 이곳의 꿈, 사랑, 현실은 평평하고 섬세하지 못했다. 반복되는 기교는 지루했고, 의도된 판타지적 속성은 시각적 아름다움이나 충만한 환상보다 탄식으로 다가왔다. 이토록 평평하고 동요 없는 스토리가 의도인지 아닌지에 대해서는 알 길이 없다. 어찌 됐든 나의 두 손이 무릎을 내려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공감의 부재때문이다. 편성을 가장한 영화 속 인물들은 공감이 아닌 괴리감을 느끼게 하는 묘한 구석이 있다.  





결국은 모두 이상


A4용지 크기의 1/100도 되지 않는 작은 칸 하나가 손에 땀을 쥐게 한다. 그 작은 칸 하나를 채우기 위해 아등바등하고, 그 하나를 채우지 못해 좌절하는 이는 요즘 무던히 냉소적이다. 환상에 빠지기 힘든 전제 조건을 갖췄다. 편파적 냉소주의에 빠진 관객의 눈에 미아와 세바스찬의 삶은 다소 이상적이다. 더불어 낭만적이다. 

     학교를 뛰쳐나갈 수 있는 용기가 있는 미아는 6년이라는 시간 동안 배우의 꿈에 매진해 왔다.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이고 결코 쉽지 않은 결정이다. 한 가지 목표에 6년이라는 시간을 바치는 것은 생각보다 꽤, 매우 어렵다. 포기해야 할 것도 눈치 봐야 할 것도 많다. 물론 그녀가 짊어진 살의 무게와 겪고 있는 현실의 고통을 가벼이 생각하려는 것은 아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원치 않는 자리에 서서 원치 않는 음악을 하는 세바스찬의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미아가, 그리도 진득하게 한 가지 꿈만을 좇을 수 있는 미아가 부럽다. 그래 여기에는 어딘가 찌질한 열등감과 자기 연민이 끈적하게 뒤엉켜 있다.  

     확실히 내게 <라라랜드>를 뒤흔드는 꿈과 환상이라는 관점에서 미아는 세바스찬보다 우위에 있었다. 미아에게 사랑은 꿈이 될 수 없다. 배우라는 꿈의 길에 사랑은 분리의 영역도 동반의 영역도 아닌 온전히 다른 영역이다. 미아는 확고하고 철저하게 자신의 꿈을 좇고 결국 이룬다. 

     반면 세바스찬에게서는 꿈을 위해 꿈을 포기하기도 하고, 꿈을 이루고 난 후 꿈을 잃기도 하는 아이러니한 삶이 잔상처럼 보인다. 원치 않는 자리에 서서 원치 않는 음악을 하는 세바스찬은 단지 미아라는 꿈을 향한 과정에 서 있을 뿐이다. 미아와 재즈라는 두 가지 꿈을 동시에 좇는 세바스찬이 이상하게도 미아라는 인물의 삶보다 가깝게 느껴지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미아라는 꿈을 잃고 그 흔적을 재즈라는 또 다른 꿈속에 간직한 채 살아가는 세바스찬은 라라랜드의 이면이자, 현실의 표면이 아닐까. 뒤틀린 엔딩의 묘미를 음미할 수 있었던 건 아름다움과 환상이 넘치는 라라랜드 때문이 아닌, 세바스찬 때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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