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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ndaleena Sep 07. 2017

이 마저도 지켜지지 않는 세상이 여기 있군요

사적인 영화일기, 필라델피아

* 영화에 대한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 이미지 출처: 영화 <필라델피아>



사적인 영화일기, <필라델피아>


얼마 전 한 승객이 촬영한 기내 동영상이 전 세계로 확산됐다. 유나이티드 항공사가 기내에서 한 남성을 끌어내리는 과정이 담긴 동영상은 참혹했다. 해당 영상을 접한 나는 머리로 열이 오르는 감각에 쉽게 잠이 들 수 없었다. 확실히 두려움보다는 분노가 앞섰다. 유나이티드 항공사의 행위에 부당한 차별 요소가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은 민감하게 받아들여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했고, 모든 걸 넘어 한 인격을 대하는 그들의 태도는 매우 부적절했다. 

     눈을 뜨자마자 접한 해당 영상에 대한 다양한 반응은 다소 경악스러웠다. 그들이 갈망하고 수호하고자 외쳤던 자유와 평등은 지나치게 선별적이었고 제한적이었다. 누군가에게 이번 사건은 끔찍한 폭력 그 자체이다. 그러나 동일한 사건은 다른 누군가에 의해 웃고 넘길 수 있는 정도의 가벼운 유흥거리로 전락했다. 사건을 풍자하기 위해 피해자를 전면에 끌어들인 행위 역시 적절하지 않았다. 


     코미디를 보고 왜 웃고 넘길 수 없냐니. 피해자의 고통을 건드리는 순간 풍자의 코미디는 2차 가해가 될 뿐이라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 듯하다. 차별의 문제를 언급한 이들은 조롱당하기도 했다. 그들은 백지 같은 '나이브'함을 드러냄으로써, 감추고 싶었던 내면의 파편화된 정의가 맨틀을 비집고 나와버린 찰나를 포착당했다. 

     간극은 분노와 탈력감의 연속을 불러왔고, 이는 고통스러웠다. 이 영화의 대사가 절실히 떠올랐다. 판사는 인종, 종교, 피부색, 성적 취향에 관계없이 법정에서는 모두가 동일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변호사 조는 이렇게 반문한다.



우리가 언제나 법정에 살고 있는 건 아니잖아요. 






내면의 파편화된 정의


그 성격은 다를지라도 '앤드류'와 '조'는 모두 유능한 변호사이다. 로펌에 소속되어 거대 기업들의 입장을 변호하는 앤드류와 광고에 등장해 자신을 홍보하며 상해 사건을 다루는 조는 경쟁 상대에서 훗날 원고와 변호사의 관계로 재회하게 된다.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일은 현실이 되었다.

     촉망받는 변호사 앤드류는 간부들의 신임을 얻어 매우 중요한 사건을 담당하게 되지만, 이 사건을 계기로 회사에서 해고를 당한다. 앤드류가 담당해야 할 고소장이 감쪽같이 사라졌고, 회사는 혼란의 책임을 앤드류에게 물었다. 

     앤드류는 직장 내 클로짓 게이이다. 회사 사람들은 그가 동성애자라는 사실도, 에이즈 환자라는 사실도 모른다. 앤드류는 자신이 해고를 당한 이유가 에이즈 때문일 것이라 확신한다. 미처 감추지 못한 이마의 붉은 반점을 직장 동료가 포착했고 고소장이 사라지는 어이없는 해프닝이 벌어졌으며, 곧 그가 해고당했기 때문이다. 


     앤드류는 자신과 함께 싸울 변호사를 구하던 중 최후의 보루로 "누구든 억울한 일이 있으면 자신을 찾아오라"고 광고하는 조를 찾아간다. 그러나 조는 앤드류가 어서 자신의 공간을 떠나 주기를 바라는 은근한 눈치를 주며 그의 제안을 거절한다. 앤드류와 악수한 손을 찝찝하게 닦아내며 주치의에게 연락을 취하기도 했다. 

     싫어하는 데 뭐 그리 구구절절한 이유가 필요하겠는가. 그의 거절에는 단순하지만 강력하고 명확한 이유가 있다. 조는 동성애자를 향한 자신의 불쾌한 감정과 편견을 인정한다. 동성애도 싫고 에이즈도 싫다. 

     그런 조가 자신의 결정을 바꾸게 된 계기는 '동질성'에 있었다. 차별이라는 정서는 그리 거창한 영역이 아닌 곳에서도 종종 일어난다. 미처 인식하기도 전에 마치 그것이 인간의 본성인 것처럼 은은하고 고요하게 발생하기도 하고, 입 밖으로 튀어나와 어떠한 행위로까지 이어지기도 한다. 분명한 것은 차별과 혐오가 0에 수렴하는 영역, 혹은 0에 수렴하는 인간을 발견하기란 쉽지 않다는 것이다.


     조는 앤드류가 겪는 차별과 멸시를 직접적으로 마주하는 순간, 그것이 자신을 향한 시선과 별 다를 바 없음을 깨닫는다. 앤드류는 에이즈를 겪고 있는 동성애자였고, 조는 흑인이었다. 결국 그는 앤드류의 곁에 앉는 걸 택했다. 조의 결정에 특별한 사명감이라는 수식어를 부여하는 건 그다지 적절하지 않은 것 같다. 시작은 인간적 공감에 이끌려 단순히 발을 들이는 시도의 단계였으니. 





노력, 그리고 노력


으레 그렇듯 힘 있고 돈 있는 적은 상대하기 어렵다. 앤드류의 전 직장은 자신들의 혐오와 차별을 감추기에 급급했다. 증인을 매수하고 앤드류의 사생활을 언급하며 그를 문란한 동성애자로 몰아갔다. 에이즈의 원인을 난잡한 성생활로 간주했다. 그들은 앤드류를 중요한 서류를 관리하지 못하는 무능력하고 무책임한 자, 에이즈에 걸린 사실을 숨겨 동료를 위험에 빠트린 자라고 강조했다. 

     초반, 법정의 주요 화두는 앤드류의 성적 취향이었다. 법정 안의 수많은 시선은 앤드류의 성적 취향을 논하고 그의 입을 통해 직접 무언가를 밝혀 주기를 원했다. 에이즈와 동성애의 연결 고리에 대한 해결하고 싶지 않으면서 확인하고 싶은 호기심과 편견의 노출은 특정 집단 혹은 개인을 대상으로 한 미움과 혐오가 얼마나 일차원적인가를 역설한다. 

     사실 <필라델피아>는 '이 마저도 지켜지지 않는 세상은 너무도 가혹하지 않을까'라는 탈력감과 좌절감의 한계선을 수호하려는 노력을 가꾸고 다듬은 영화이다. 그래서인지 영화는 현실의 참혹성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쪽에 가깝지 않다. 과정은 평면적이고 짐작 가능하다. 존중과 이해는 관계의 발전에 거룩한 토대가 되고, 권력에 맞선 약자들은 정의의 승리라는 길을 걷게 된다는 그런 이야기이다. 

     미움, 혐오, 호기심, 차별의 감정은 일대일, 일대다, 혹은 다대다로 연결되어 있다. 여러 요소가 한 원을 이루고 있는 관계 맺음에서는 어느 한 요소에 문제가 생겼다는 것,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아채기가 쉽지 않다. 고장 난 부분을 새 것으로 교체하는 것 역시 어렵다. <필라델피아>는 일차원적 미움과 혐오에서 비롯되는 모든 폭력에 대한 분명한 메시지를 영화 속에 관통시키고 있다. 그 가치 있는 시도가 <필라델피아>를 오랫동안 기억하게 하는 이유가 아닐까 싶다. 

     영화는 최소한의 인간다움에 대한 선망과 수호에 대한 노력을 이야기한다. 1994년에도 2017년에도 진행 중인 혐오와 차별의 폭력에 대한 싸움을 말이다.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충분히 행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춘 장애자에 대한 차별을 금지한다. 이 법령에는 에이즈에 대한 차별이 명시돼 있지는 않으나 이후의 판례는 신체적 제한과 질환에 대한 편견으로 인해 에이즈 역시 장애의 한 형태로 간주한다. 편견으로 인한 사회적 매장은 곧 육체적 사망과 연결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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