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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ndaleena Sep 07. 2017

불편하고 불쾌한 117분

사적인 영화일기, 23 아이덴티티

* 영화에 대한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 이미지 출처: 영화 <23 아이덴티티>



사적인 영화일기, <23 아이덴티티>


제임스 맥어보이와 M. 나이트 샤말란 감독이 만난 영화 <split>이 <23 아이덴티티>라는 다소 노골적인 이름을 달고 국내에 개봉했다.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맥어보이의 열연은 찬양받았고 영화에 대한 호기심이 일기 시작했다. 

     그러나 뚜껑은 그대로 닫혀 있는 편이 나을 뻔했다. 스릴 없는 스릴러 장르는 피로하고 지루하다. 거기에 학대의 합리화와 여성을 제물로 삼는 고리타분한 
악습의 반복이 더해진다면 두말할 것 없이 피로는 배가 된다. 제임스 맥어보이의 존재로도 어찌할 수 없는 스토리와 연출은 누군가의 말처럼 <23 아이덴티티>를 단순 '초장편 제임스 맥어보이 연기 쇼케이스'로 한정시켰다. 그것도 나름의 의미는 크지만 말이다. 

     영화는 꽤 불쾌하고 불편했다. 의문과 아쉬움을 넘어 다소 실망스러웠고 경악스러웠다. 한 인간 안에 무려 23개의 독립적이고 개별적인, 고유한 인격이 존재한다는 것이 영화의 시작이다. 영화는 이에 스릴러와 공포라는 장르를 입혔다. 그 과정에서 죄 없는 여성들은 소비되고 소모되었고, 범죄자의 뻔뻔한 합리화는 미화되었다. 
그것이 스릴러라는 장르적 쾌감을 위한 장치였다면 더욱이 용납하기 어렵다.  





힘의 상대성


'케빈'은 과거 어머니로부터 학대를 당한 기억이 있다. 여러 여성들로부터 조롱당한 기억도 있다. 케빈이 지닌 학대와 조롱이라는 상처는 23개의 서로 다른 인격을 만들어 냈고, 그중 '패거리'라고 불리는 인격들은 절대적 힘을 갈망하게 된다. 이들은 자신들을 구원할 의식을 시작했고, 패거리 중 한 명인 '데니스'는 제물로 바칠 소녀를 준비하기 위해 행동을 개시한다. 흠집 없고 얼룩 없는, 밝고 풍족한 가정이라는 울타리를 가진 존재를 향한 상대적 박탈감과 비뚤어진 멸시는 납치의 동기가 되고 패거리는 이를 정당하다 믿는다.

     
영화는 반복적으로 가해자의 행위에 방아쇠를 당긴 원인이 모두 여성으로부터 기인했다는 것을 강조한다. 그러나 분명히 해두어야 할 사실은 힘은 상대적이라는 것이다. 학대당하고 조롱당하던 어린 시절 케빈은 명백한 가해자가 되어있다. 그는 소녀들을 대상으로 그토록 갈망하던 물리적 힘의 우위에 서있다. 그의 행위가 결코 정당화될 수 없는 이유이다. 그가 벌이는 모든 행위는 결국 약자를 대상으로 한 제멋대로의 폭행이다. 자신이 만들어낸 정의의 모순에 갇혀버린 꼴이다. 

     게다가 케빈이 가진 '해리성 인격 장애'라는 특수성은 범죄 미화의 도구로 활용되고 있었다. 
자신의 상처를 위로하고 치유하기 위해 상처(학대) 받지 않은 자들에게는 벌을 가하는 여러 인격들의 행위는 엄연한 범죄임에도 영화는 학대받던 케빈, 조롱당하던 케빈의 과거를 은근슬쩍 내비치며 위의 행위를 정당화하려 한다. 패거리가 벌이는 행위에 당위성을 부여하려 하는 모든 설정은 가해자도 피해자이며 학대받은 불쌍한 영혼임을 납득시키기 위한 가당찮은 노력으로 받아들여진다. 


     범죄는 결코 트라우마로 합리화될 수 없다. 그러나 영화는 이 사실을 끝끝내 외면한다.  





제물로 바쳐지는 어린양


여성 캐릭터를 이토록 소모적으로 도구화하는 영화는 실로 오랜만이다. <23 아이덴티티>는 납치당한 소녀들을 가해자의 시선에서 '철저한' 피해자로 묘사한다. 매우 폭력적이다. 물리적 힘을 기준으로 절대적 약자의 위치에 놓인 소녀들의 탈출 시도는 힘의 우위성을 가진 남성 범죄자에 의해 번번이 좌절된다. 이러한 루트의 반복은 소녀들이 철저한 약자임을 강조한다. 마치 영화 속 여성 캐릭터들이 피해자이기 위해 존재할 뿐임을 이야기하듯 말이다. 

     이에 더해진 노골적인 연출은 
한마디로 저급한 성적 대상화를 목표로 한다고 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결벽에 가까운 습성을 가진 남성 인격을 설명하기 위해 끊임없이 소녀들의 옷을 벗기는 설정도, 그것을 온전히 노골적으로 담아내는 시선도 불쾌했다. 
뿐만 아니라 영화의 큰 축인 남성 주인공의 트라우마에 대한 묘사는 철저하게 절제되어있으면서 여성 주인공의 성적 트라우마에 대한 묘사는 불필요하게 장황했다.

     불편함이 극도에 달하는 것은 여주인공의 트라우마가 결국 가해자로부터 연민과 동조를 불러 일으켜 그녀의 목숨을 구한다는 설정이다. 
대체 의도하는 바가 무엇이었을까. 여주인공이 삼촌이라는 학대의 늪에서 완전하게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은 느낌을 주는 암시 역시 눈살이 찌푸려지는 부분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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