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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ndaleena Sep 07. 2017

괜찮아요, 아니 괜찮지 않아요

사적인 영화일기, 맨체스터 바이 더 씨

* 영화에 대한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 이미지 출처: 영화 <맨체스터 바이 더 씨>



사적인 영화일기, <맨체스터 바이 더 씨>


배역을 맡은 배우의 사생활에 대한 이야기는 잠시 접어둔 채 영화 그 자체에 대한 이야기만을 하고자 한다. 물론 특정 배우, 그리고 그 배우의 행동에 대한 이야기를 묻어두고 잊어버리자는 건 아니다. 이 영화가 어떤 평가를 받고 있고, 어떤 시상식에서 어떤 상을 받고 있든 간에 그것들이 케이시 애플렉의 성추행이라는 극악한 만행을 합리화하는 방어기제로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맨체스터 바이 더 씨> 속의 '리 챈들러'와 '케이시 애플랙'은 분명 다르다. 리의 삶을 안타깝게 여기고 그를 이해할 수는 있어도, 케이시 애플렉의 행동을 이해하고 넘어갈 수는 없다. 그의 만행이 사라지거나 미화되거나 잊히지 않길 바라지만 그에 대한 이야기를 이곳에서 시작하면,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전혀 할 수 없을 것 같으니 잠시 접어두자는 것이다.





끼어들 수도, 함부로 매울 시도도 할 수 없는 그의 틈 


보스턴의 한 아파트 반지하에 거주하며 세입자들의 집을 수리하는 일을 하는 '리'가 어떤 연유로 보스턴에 흘러 들어오게 되었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우리는 그의 과거를 모른다. 이야기는 기계적으로 묵묵히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해내는 그를 따라 고요하게, 무덤덤하게 흘러갈 뿐이다. 그렇지만 텅 비어버린 눈동자와 혈기가 돌지 않는 안색, 고인 물처럼 말라가는 리의 척박함은 우리의 동요에 시동을 건다.

     누군가로부터 전화를 받은 그가 급하게 차를 몰고 달린다. 이전에는 볼 수 없던 감정의 술렁임이다. 드물게 흥분해 있고 초조해한다. 그가 향한 곳은 다름 아닌 병원이다. 리는 잠을 자고 있지만 분명 잠들어 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는 형의 얼굴을 담담하게 한 번 확인하고 돌아선다. 형의 죽음 앞에 그는 눈물을 쏟아 내거나, 휘청이지 않는다. 현실을 부정하는 거센 도리질도 없었다.

     그의 내면도, 그의 표정도, 그의 몸짓도 모든 것이 절제되어 있다. 미련을 두지 않는 컷의 구분과 정직하게 인물을 따르는 카메라의 움직임까지 모든 것이 정적이고 절제된 영화에서 동요하고 있는 것은 '나 하나뿐'이었다. 그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싶어 안달이 나기도 했었다. 

     리가 자신의 과거가 존재하는 맨체스터의 이곳저곳을 찾을 때마다 그의 슬픔은 이전에 없던 모습으로 낱낱이 그 내면을 드러냈다. 감히 위로를 건네기도 어려운 누군가의 아픔을 마주했을 때, 내가 보일 수 있는 유일한 반응은 그저 두 눈을 깜빡이는 것이었다. 어쩌면 나는, 그의 내면이 궁금해 안달 났던 조금 전의 자신에게 약간의 질타를 던졌을지도 모른다.





패트릭의 존재감


'패트릭'은 리만큼이나 아버지의 죽음에 큰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영안실에 누워있는 아버지의 얼굴을 확인하는 것이 전부였다. 친구들과 어울려 놀고, 밴드 합주에 정신이 없는 패트릭은 여느 때와 다를 바 없었다. 이리저리 발을 걸치는 연애 사업에도 한창이었다. 그런 패트릭의 행동이 의아하지 않았던 이유는 그것이 패트릭이 슬픔을 견뎌내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일상의 여느 때처럼 행동하고 자신의 일에 몰두하는 것은 감당할 수 없는 큰 크기의 상실과 슬픔을 마주했을 때 그가 취할 수 있었던 유일한 방법이었다. 


     어쩔 수 없음을 대하는 유일한 방법 말이다.  


     아슬아슬하게 유지되는 표면의 고요 속에는 언제 깨질지 모르는,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거대한 슬픔이 있다. 그리고 이 얇디 얇은 고요의 유리막은 패트릭의 무의식에 의해 와장창 깨져버린다. 눈물을 흘릴 수도, 숨을 쉴 수도 없다. 자신이 왜 우는지 이유도 모른 채 눈물을 펑펑 쏟아내는 이 어린아이를 짓누르는 감정의 무게 앞에서 할 수 있는 건 또 다시 두 눈을 깜빡이는 것뿐이었다. 


 



어쩔 수 없음을 아는 사람들의 삶


슬픔은 잠시 자취를 감춘 것뿐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아픔이 흐려진다는 말은 말일뿐, 그들은 흐려질 수 없는 아픔을 온몸으로 버텨내고 있었다. 회피하고 도망치고 싶은 맨체스터에서의 일로부터 자신을 감춘 채, 고개를 숙이고 몸을 잔뜩 웅크린 채 말이다. 가해자도 피해자도 없는 이 절대적 슬픔을 그저 버티는 것이 유일한 방법임을 그들은 알고 있다. 그래서 그들의 동요가, 분열이, 삶이 견딜 수 없을 만큼 먹먹했다. 

     <맨체스터 바이 더 씨>는 결코 눈물이 차오르거나 엉엉 울고 싶게 만드는 영화는 아니다. 단지 숨을 쉬기가 조금 버거워질 뿐이다. 간간이 큰 숨을 토해내며 자리를 떠날 수 없게 만든다. 이 영화의 슬픔은 그렇다. 
철저한 외부인이 되어 그들의 삶을 멀찍이서 지켜보는 것만을 허용한다. 함부로 눈물을 쏟을 수도, 동정할 수도, 공감할 수도 없다.

     영화는 한결같이 담담하고 덤덤하지만, 저 깊은 곳에서 소용돌이치는 거대한 슬픔의 존재를 온 피부로 느끼게 한다. 맨체스터의 잔잔하고 정갈한 바다를 가르고 밀려오는 따끔하고 날카로운 바람이 일으키는 내면의 동요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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