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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ndaleena Sep 13. 2017

We were no longer minority

사적인 영화일기, 런던 프라이드

* 영화에 대한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 이미지 출처: 영화 <런던 프라이드>



사적인 영화일기, <런던 프라이드>


이 나라는 언제나 모두에게 공정한 곳은 아니었다. 긴 시간 경험으로 체득해 온 불공정성, 가령 똑같은 잘못을 저질러도 아버지가 국회의원인 저 놈은 그런 아버지가 없는 나와 달리 벌을 받지 않는다는 사실에 우린 알게 모르게 익숙해져 있었다. 늘 그래 왔기에 아이러니하게도 우린 공정하지 못한 것에 예민하고 동시에 둔감했다. 

     그러나 '최소한의 공정성'에 대한 배반은 연대의 시작이 되었다. 그들은 우리의 가치를 철저히 기만했다. 그래도, 그래도 노력하면 최소한 정당한 보상은 받을 수 있겠지라는 희망과 불빛을 깨부수고 있었다. 오랜 시간 아팠던 우리는 수십 년간 그들이 철저하게 깨부수려 했던 불빛을 모아 더 큰 빛을 만들어 내는 길을 택했다. 더욱 강해지고 단단해지기 위해 거리로 나섰다. 

     그렇게 우리는 모였다. 평생 잊을 수 없는 토요일의 밤을 회상한다. 수많은 인파가 한 마음으로 한 목소리가 되었던 그 밤을 말이다. 우린 외쳤다. 우리의 현재를, 미래를, 과거를 위해.





나를, 그리고 우리를 위로하고 싶다


1970년대 영국의 인플레이션과 실업률은 심각한 수준이었다. 경제 사정은 날로 악화되었고, 산업은 변화하고 있었다. 영국 정부는 이에 적극적으로 대응했다. 마가렛 대처는 변화의 중심에 있었다. 산업의 흐름에 따른 주 자원의 변화에 그녀는 강경한 경제 정책을 펼쳤다. 이에 광부들은 노조를 결성하고 시위를 벌였다. 길고 긴 싸움이 이어졌다. <런던 프라이드>는 그 시기의 광부들, 그리고 또 다른 탄압의 영역에 속해있던 런던 동성애자들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이다.

     에이즈를 양산하는 더러운 변태 집단. 동성애자에 대한 시선은 미움과 혐오로 가득했다. 정부와 언론은 동성애자에 대한 혐오감을 조성하는 데 조용히 앞장서고 있었다. 이에 런던의 게이와 레즈비언들은 거리로 나섰다. 경찰은 그들을 조롱했고 탄압했다. 


     게이와 레즈비언의 행진에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는 '마크'는 최근 경찰들의 탄압이 잠잠해진 것에 대해 의문을 품는다. 답은 광부들의 파업에 있었다. 광부들이 노조를 결성해 파업을 지속해 나가자 이를 막을 경찰 병력이 광부들 쪽으로 투입된 것이다.

     마크는 노동자들의 파업을 지지하자고 주장한다. 런던의 몇몇 동성애자들이 아지트로 삼고 있는 '게딘'과 '조나단'의 서점에 모여 그들을 위해 모금 운동을 하자고 제안한다. 물론 모두가 마크의 의견을 지지하는 것은 아니었다. 광부들에게 조롱당하고 차별받던 기억을 떠올리며 그들을 돕고 싶지 않다며 서점을 나가버리는 이들도 있었다. 그러나 마크의 뜻은 굳건했다. 


     마크는 단지 그가 게이라는 이유로 사회의 안전 영역 밖으로 밀려난 소수자였다. 동성애자는 정부와 언론의 정책 희생양이었고, 마크는 소수자의 입장에서 또 다른 희생자인 광부들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대선 이전, 우리는 차기 대통령이 되고자 하는 이들의 토론회를 수 차례 시청했다. 하루는 그들의 가치 싸움 중심에 '동성애'가 등장했다. 그들은 애초에 찬성과 반대라는 입장으로 나눌 수 없는 영역을 진보와 보수의 대결 구도에 끌어와 싸움을 시작했다. 


     사회 유력 인사나 정치인과 같이 대게 신뢰할 가치가 높다고 평가받는 인물의 발언은 다수에게 큰 영향을 미친다. 그들의 발언은 분명 누군가를 선동할 힘이 있다. 이들의 입장 표명은 차별을 악화시키기도 하고 완화시키기도 한다. 전파의 특권을 누릴 수 있는 몇 안 되는 권력자들에게 누군가의 정체성을 공개적으로 좌절시킬 권리는 없다. 그들은 소수자들이 사회 구성원으로서 느낄 수 있어야 할 안정감과 소속감을 박탈시키는 데 앞장섰다. 이는 명백한 혐오였다.


     소수자라는 정의는 사회의 다수 혹은 상대적으로 좀 더 큰 힘을 가진 이들에 의해 결정된다. 이는 곧 우리 자신이 소수자 영역으로부터 완전히 별개의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의미한다. 경험을 통해 익히 느껴왔을 것이다. 요즘 정세를 보면 안타깝게도 소수자에 대한 포용보다는 배제를 택하는 꼴이 지배적인 듯하다. 다수를 선동하는 데에 차별과 배제의 발언이 더욱 효과적이라는 것이 증명되어 왔고, 권력층은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소수자를 향한 그들의 공개적 차별과 혐오는 지나치게 위험했다. 


     우리 모두는 존중받아야 마땅한 존재이다. 현시점 나를, 그리고 우리를 위로하고 싶었다. 그리고 이 영화는 적절한 위로였다. 





때로는 희박한 가능성의 희망을 꿈꾼다


마크와 몇몇 동성애자들은 '광부들을 지지하는 게이와 레즈비언 연합(LGSM)'을 결성해 모금 활동을 시작한다.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동성애자의 도움은 받고 싶지 않다며 광부 노조로부터 직접 거절당하기도 했다. 자신들을 돕기로 한 이들이 동성애자 집단이라는 사실에 명백한 혐오를 보이는 웨일스 광부들의 냉대를 마주하기도 했다. 

     실화를 기반으로 한 모든 영화가 사실을 있는 그대로 다루는 것은 아니다. 영화가 극적인 장면을 선별적으로 연출한다는 점에서 <런던 프라이드>의 스토리 역시 상당히 선택적이다. 파업이 절정에 달했던 시기만을 집중적으로 포착하고 있기 때문이다때문에 연대와 화합이라는 시간의 흐름은 '가능할까'라는 의구심이 들 수 있을 만큼 빠르고 경쾌하다. 완전히 다른 집단이라 생각했던 이들은 긍정적이고 유쾌한 방식으로 유대감을 다져 나갔고, 동성애자를 향한 막연한 미움과 혐오라는 경계는 노래와 춤으로 포장되어 허물어진다. 하나가 되는 과정은 꽤나 유연했다. 

     실제 1985년 광부들의 파업은 실패로 끝났지만, <런던 프라이드>는 파업 자체의 진행과 결과보다는 그 과정에서 벌어지는 소수자들의 '연대'에 집중하기를 택했다. 때로 우리는 희박한 가능성의 희망을 꿈꾼다.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말이다. 절망의 순간에는 더욱 그러하다. 

     <런던 프라이드>는 우리를 '모든 소중한 이'로 지칭한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왜 그런 것들이 있지 않은가. 어딘가 부족하고 말이 되지 않아도 밉지 않은, 사랑스러운 것들 말이다. 이 영화가 그렇다. 분명 보고 싶은 부분만을 선택적으로 그려내고 모든 걸 긍정적 방향으로 이끌어 내는 데 여념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부족한 부분이 거슬리지도, 아쉽게도 느껴지지 않는다. 모든 이들이 지니고 있는 소중한 가치를, 자존감의 회복을 노래하는 영화는 지나치게 사랑스럽고 부끄럽게도 고맙다. 



게이의 권리는 주장하면서, 다른 사람의 권리는 지지하지 않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노동자의 권리는 주장하면서, 여성의 권리는 지지하지 않는다면요? 이건, 비논리적인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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