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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ndaleena Sep 11. 2017

믿음을 향한 냉정한 위로

사적인 영화일기, 사일런스

* 영화에 대한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 이미지 출처: 영화 <사일런스>



사적인 영화일기, <사일런스>


가시적이지 않은 존재에 대한 실체 없는 추상적 믿음만큼 위태롭고 무한한 것이 어디 있을까. 절대적이고 지배적인 힘을 발휘할 때가 있는가 하면, 지지대를 상실한 채 한없이 나약하게 흔들리기도 한다. 믿음은 상황과 상대에 따라 시시각각 모습을 바꾸는 상당히 가변적인 존재이다.

종교에 대한 믿음은 더욱 그러하다. 
수많은 개인이 종교라는 하나의 공통된 카테고리 안에 속해있더라도 믿음을 행하는 형태가 다른 이유는, 개개인의 특성과 상황에 기인할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한순간의 의심도 나약함도 없이 믿음이 굳건하게 유지되었을지 모르지만, 적어도 나에게 종교, 그리고 신을 향한 믿음은 아직도 확언할 수 없을 만큼 낯설고 어렵기만 하다. 

길고 긴 영화의 러닝타임 내내 명확한 건 없었다. 신도들의 고통, 흔들리는 믿음, 침묵하는 신 아래 나의 믿음 역시 철저하게 흔들렸고 고뇌는 깊어졌다. 고뇌는 물음에서 시작하고, 물음은 불신과 두려움에서 비롯된다. 선교는 옳은 것인가, 박해와 선교 중 마땅하지 않은 것이 있기는 한가, 순교와 배교의 경계를 분명하게 구별할 수 있을까. 

<사일런스>는 절대자의 존재를 확인하고 구원받길 희망하는 마음이 담긴 영화라기보다는, 인간의 믿음과 의심에 대한 깊은 사유를 읊조리는 영화에 가깝다. 만들어진 집단의 가치에 의하면 신을 향한 믿음은 흔들려선 안 된다. 신을 의심하는 행위도 안 된다. 배교를 한 사람은 신에 대한 믿음을 져버린 자, 교회에 속할 수 없다. 그러나 영화 속 인물들은 끊임없이 흔들리고 심지어는 배교를 한다. 자신의 굳건한 의지가 결코 흔들리지 않을 것이라 확신했던 로드리게스 신부마저 배교를 택한다. 교회의 법칙에 의하면 배교를 한 자는 신부도, 신도도 아니다. 그렇다면 이들의 믿음은 사라진 것일까. 이들을 배신자라 비난할 수 있는 것일까. 

<사일런스>는 아니라고 답한다. 영화는 신을 향한 사랑과 믿음, 즉 신앙을 따르는 인간에 초점을 맞춘다. 때로는 교회의 판단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는 법이다. 키치지로와 로드리게스 신부, 페레이라 신부의 마음속에 신은 영원히 존재했던 것처럼 신앙이라는 것은 결코 겉으로 보이는 것이 아니다. 타인이 판단할 수 없다. 


마틴 스콜세지 감독은 탄탄하고 섬세한 과정을 통해 꽤 대범한 물음에 답을 제공한다. 신을 향한 인간의 믿음, 의심, 사랑의 고뇌에 연민과 찬양을 아끼지 않는다. <사일런스>는 종교를 떠나 한 번쯤은 가져봤을 법한 자신의 신념에 대한 냉정한 위로가 아닐까. 



결국 믿음


감정의 동요가 일어날 때면 우리는 곧잘 신을 찾는다. 고통과 불안, 불행의 순간에 끊임없이 신의 존재를 확인하기 위해 애쓴다. 그러나 신이 보내는 것은 침묵뿐이다. 믿음은 바다 한가운데를 표류하는 맨몸뚱이처럼 정처 없이 흔들린다. 신이 있다면 이토록 큰 불행을 어떻게 보고만 계실 수 있는지, 온갖 악의 만행으로 희생당하고 상처받고 파별하는 이들을 어찌 구원해주시지 않는지 절망하고 의심한다. 

<사일런스>는 탄압의 기조가 절정에 달하던 때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17세기 나가사키는 '동쪽의 로마'라고 불릴 만큼 가톨릭 신자의 수가 급증하던 곳이었다. 그러나 일본 '에도 막부'는 가톨릭의 확산을 용인하지 않았고 선교를 위해 일본에 머무는 신부들을 포함, 일본인 신자(기리시탄)를 강력하게 탄압했다. 막부의 지배층은 신부와 신자들에게 배교의 증거로 '후미에(예수나 성모 마리아가 성화상을 밟고 지나가는 행위)'를 강요했고 이를 거부하면 고문하거나 사형했다. 

'로드리게스' 신부가 일본으로 향하는 목적에는 포교뿐만이 아니라, 스승 '페레이라' 신부가 일본에서 배교를 했다는 소문의 진상을 확인하고자 함도 있었다. 스승이 배교를 했을 리 없다는 것이 로드리게스의 의견이다. 그는 "페레이라 신부가 배교했다면, 그것은 개인의 문제가 아닌 가톨릭 교회 전체의 패배"라고 단언한다.

그러나 나가사키에 도착하기 전부터 로드리게스와 동료 '가루페' 신부의 마음에는 불안과 의심이 피어오른다. 두려움 속에서 
의심하고 또 의심한다. 신부라는 자신의 존재를 무조건적으로 따르는 신도들이, 단지 그 이유만으로 끔찍하게 죽임 당하는 절망 앞에서 그들의 믿음은 더욱 흔들린다. 신이 계시다면, 어떻게 저들의 고통을 모른 척하실 수 있는 것인가. 로드리게스 신부는 신에게 해답을 구하고 구원을 요청한다. 그러나 현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배교하지 않는 자신 앞에서 신도들은 처형당하고 고통에 몸부림친다. 자신의 죽음은 일본 교회의 죽음이라 말하던 그는, 페레이라가 그랬던 것처럼 결국 배교를 택한다. 

그렇다면 이들은 더 이상 신을 믿지 않는 사람들일까. 아니다. 페레이라 신부는 로드리게스를 설득하며 이렇게 말한다. 인간에 대한 사랑 때문에 예수님도 성화를 밟았을 거라고. 교회의 논리에 의하면 이들은 분명 배교한 것이지만, 믿음과 사랑을 문자와 체제로 한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시도 때도 없이 후미에에 응하는, 즉 배교를 하는 '키치지로'의 믿음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키치지로는 예수를 배신하는 '유다'를 연상시키는 인물이다. 그는 로드리게스 신부를 고발하고 은전 30냥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언제나 다시 돌아온다. 살기 위해 배교하고 죄책감을 덜기 위해 신부를 찾아 고해성사를 부탁한다. 짜증이 날 정도로 쉽고 빠르게, 그것도 매우 자주 태세를 전환하는 키치지로를 단순 배신자로 단언할 수 없는 이유는 그의 나약함을 탓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나약한 것은 죄가 아니다. 박해가 없던 시절에 태어났더라면 그는 평화롭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가혹한 시대, 나약한 인간. 이를 비난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심지어는 신조차 이를 비난할 수 없을 것이다. 로드리게스 신부는 반복되는 그의 행동에도 고해성사를 내려준다. 그리고 예수님에게 묻는다. 유다에 대한 예수님의 마음은 어떠했는지. 

로드리게스의 키치지로에 대한 의심은 연민으로, 결국은 사랑으로 읽을 수 있을 것이다. 키치지로의 신앙도 신앙이다. 
키치지로야 말로 <사일런스>가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가장 강력하게 전하는 인물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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