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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ndaleena Sep 10. 2017

안정만을 향해 가는 소란스러움

사적인 영화일기, 밤의 해변에서 혼자

* 영화에 대한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 이미지 출처: 영화 <밤의 해변에서 혼자>



사적인 영화일기, <밤의 해변에서 혼자>


개인적으로 홍상수 감독의 영화에 특별한 취향을 갖고 있지 않기에 <밤의 해변에서 혼자>를 홍상수 영화 입문작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작품에 이끌린 것은 호기심 때문이었다. 단순 호기심이라 명명하기에는 어딘가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음을 스스로 인정한다. 영화로 발걸음을 이끈 것은 출연 배우와 감독의 사생활에 대한 지극히 사적인 호기심이 분명했으니. 

홍상수 감독의 영화를 잘 모름에도 그가 형성하는 세계가 낯설지 않은 이유는 공통된 소재와 어느 정도 일관성을 갖는 흐름 때문일 것이다. 감독의 영화에 불륜이 주요 소재로 등장한 적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불륜이라는 소재가 이전에 존재하지 않았던 그의 영화에 대한 불편함이나 불쾌감, 혐오와 불만족의 정서를 유발했다면 어딘가 모순적이기도 하다. 

술이 단순히 대화의 물고를 트는 역할뿐만 아니라, 인물의 내면과 심리를 꽤나 깊숙하게 묘사하는 데 중요한 매개가 된다는 구도 역시 익숙하다. 일상에서 누구나 한 번쯤은 가져봤을 법한, 흔히 치졸하고 찌질하다고 여겨지는 은밀한 부분을 어떠한 극적인 연출 없이 드러내는 재미가 크다는 점에도 동의한다. 어딘가 익숙한 감정을 부유하게 하는 장치들은 <밤의 해변에서 혼자> 곳곳에도 포진해 있다. 그러나 이 영화가 유달리 낯선 이유는 온전히 '영희'때문일 것이다. 



나와 그, 너와 그


많은 이들이 그의 영화를 '순간과의 교감'이라 칭한다. 감독 특유의 즉흥적이고 순간적인 작업 방식 때문인지 전제와 염두를 벗어난 그의 영화는 포착과 직면에 가깝다. 특히 영희가 그려내고 이끄는 감정의 선율이 그러하다. 그녀는 종종 대화의 흐름을 벗어나기도 하고, 의아하게 느껴질 법한 말을 툭툭 던지기도 한다. 어쩌면 의미를 파악하려 드는 행위가 불필요할지도 모른다. 

영화는 독일을 배경으로 시작된다. 영희는 결혼한 감독과 부적절한 사랑에 빠진 여배우라는 제2의 신분을 안고 독일로 몸을 옮겼다. 구체적인 지명이 언급되는 대신 사람들이 가장 살고 싶어 하는 도시라는 말과 함께 영희는 자신이 머무는 곳에 감탄과 애정을 아끼지 않는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곳은 지나치게 쓸쓸해 보이기만 한다. 단단히 여민 코트 깃도 쌀쌀한 바람을 막을 수 없었다. 행복하다는 영희의 말은 침침한 하늘 위를 둥둥 떠 다닌다. 

거리의 나뭇가지처럼 앙상해 보인다, 영희는. 

그녀는 분명 과정에 놓여 있을 것이다. 꽤 단호한 결심이 선 것처럼 '나답게 살 것'이라 말하고 하루를 보내고 있지만, 문득문득 표출되는 그녀의 또 다른 내면은 쉽게 포착된다. 아직 그녀 내면에 입주해 있는 두려움과 그리움, 그리고 쓸쓸함은 집을 떠날 준비를 마치지 못한 것 같다.

그런 영희는 타인의 관계에 대한 관찰과 물음으로 답을 구하려 하고 있는 것 같기도, 혹은 자신이 내린 답에 대한 근거를 마련하려 하는 것 같기도 하다. 지인의 결혼생활을 궁금해하고, 독일에서 만난 남자와 부인의 관계를 관찰한다. 정확히 명명할 순 없지만 내적으로든 외적으로든 분명 자신의 어떠한 부분을 손상시킨 '사랑'의 결과를 영희는 타인의 관계에서도 발견하고 싶어 한다. 아무래도 영희는 결연보다 처연에 가까운 것이 분명하다.



소란스러운 화법


그간 그녀가 어떤 화법을 구사하는 인물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영희의 말에는 거침이 없다. 특히 관계를 맺고 있는 남성에 대해 그렇다. 사랑에 빠진 이들에게 영희는 "안색이 좋지 않다"는 말을 자주 한다. 그들을 동정하는 듯 조롱하는 듯한 태도를 보인다. 그 말에는 숨기지 못한 내면의 응어리가 가득 담겨있었다. 그녀의 순응, 상처, 타협, 아픔, 분노, 절망이 곳곳에서 시선으로 말로 쏟아진다. 

이러한 그녀의 화법은 공감하기가 다소 쉽지 않다. 영희는 타인을 부정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입장을 드러낸다. 모두가 사랑할 자격이 없는 사람이라 비난하고 질책한다. 그녀는 질척이는 사랑의 잔해에서 자신만 빠져나오려 하는 방식 대신, 모두를 그 속으로 포함시키는 방식으로 자신의 합당함을 주장하려 든다. 자신이 아프고, 외롭고, 상처받았음을, 그리고 무언가를 깨달았음을 전달하려 한다. 불분명한 혹은 포괄적인 대상을 향해 받아주기 힘든 어리광을 피우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영희의 주변 사람들은 그녀의 모든 쏟아냄을 흡수하려 한다. 그들은 영희 한정, 무척이나 편파적인 사람들이고, 때문에 충분히 이질적으로 느껴진다. 그들은 언제나 영희를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을 더욱 강하게 드러내지 못해 안달 난 사람처럼 군다. 반복적으로 강조되는 주변인들의 애정은 온전한 집중을 방해하는 사족 같기도 하다.

영희로도 충분하다. 주변 사람들의 입을 빌어 영희의 처지를 덧붙여 설명하지 않아도, 영희의 재능을 안타까워하며 그녀를 향한 아낌없는 애정을 반복적으로 퍼붓지 않아도 된다. 기로에 서 있는 아슬아슬한 영희는, 온몸으로 현실을 흡수하고 변화를 모색하려는 영희는 그녀 자신의 걸음걸이만으로도 눈동자만으로도 충분하다. 

사랑에서 비롯된 잔여물 같은 감정의 응어리가 영화를, 그리고 영희를 이끄는 주요 원인이다. 영희는 그 질척이는 잔여물을 내면으로 외면으로 흡수하고 뿜어내는 반복을 유연하게 보여주는 매력적인 캐릭터이다. 그럼에도 불구, 영화는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은 것 같다. 영희가 길을 건널 수 있도록,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할 수 있도록, 울 수 있도록, 웃을 수 있도록 영희의 주변은 온전히 그녀에게 안전한 환경을 형성하는 데 여념이 없다. 절정은 상원이 읊는 '사랑에 관하여'가 흘러나오는 순간이었다.

아, 혼자만의 안타까움이 절로 터져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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