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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ndaleena Jul 11. 2018

착한 사람, 나쁜 사람

사적인 영화일기, 파운더

* 영화에 대한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 이미지 출처: 영화 <파운더>



사적인 영화일기, <파운드>


더블 불고기버거 세트 하나를 주문해 등을 기댈 수 있는 자리를 찾아 앉는다. 짭짤하고 달콤한 불고기버거 소스를 음미하며 시원한 콜라를 홀짝이는 건 두고두고 절대 질리지 않을 소소한 쾌락이다. 맥도널드는 분명 인스타그램을 타고 성행하는, 그러니까 요즘 유행하는 소수의 수제 버거 판매점은 아니다. 햄버거를 먹기 위해 예약을 해야 한다거나 대기자 명단에 이름을 올려야 하는 등의 수고스러운 행위는 이곳에서 납득되지 않는다. 으레 그래 왔듯이 부담 없이 들어가 자신만의 스테디셀러 메뉴를 주문한 뒤 편하게 앉아 먹고 나가면 그만이다. 빠르고 간편하고 무엇보다 익숙하다. 

낯선 나라에서 맥도널드의 노란 아치형 간판을 발견할 때면 '사람 사는 거 다 똑같다'라는 안도감과 반가움이 밀려온다. 24시간 불이 꺼지지 않는 이 노란 가게는 햄버거에 대한 인종과 국가를 초월한 기준을 만들어 냈고, 셀 수없이 많은 이들의 입맛을 길들이고 있다

<파운더>는 맥도널드가 이름 이상의 의미를 갖게 되는 과정을 그린다. 자칭 '맥도널드의 설립자' 레이 크록이 전면에 등장하는 이 영화는 종래에 자본주의 사회의 생존 전략에 대한 양가감정을 불러일으키기까지 한다. 좀 더 나아가면 1955 버거에 대한 의문과 의심까지도 갈 수 있으려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나의 거주지가 '맥세권'이 되기를 희망한다효율적이고 위대한 미국식 사고의 정점을 상징하는 황금 아치의 허울 좋은 이상성을 포착해 냈음에도, 여전히 황금 아치에 반가움을 느낀다는 건 참 아이러니하다. 



불이 들어오지 않는 전구를 만드는 그 남자의 수완과 능력


'레이 크록'의 큰 그림은 어찌 보면 치밀하고 잔혹하지만, 허술한 부분도 적지 않다. 식품 생산에 포드식 생산 방식을 도입한 것도, 메뉴를 고안한 것도, 황금 아치를 만들어 낸 것도 그의 업적은 아니었다. 레이는 맥도널드 경영에 구원의 아이디어를 고안해 낸 이도, 밀크셰이크 파우더를 제안한 이도 아니었다. 그에게 그럼 대체 무얼 했느냐 묻는다면, 그는 뻔뻔스러운 미소로 이렇게 답할 것이다. 



나는 승리의 콘셉트를 고안해냈어.



1940년대 미국 외식 시장에서는 '드라이브스루'가 인기였다. 이 시스템이 음식 가격을 낮추고 소비자의 편리성을 극대화할 수 있을 것이라 예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상은 달랐다. 직원들을 대상으로 한 성추행이 시도 때도 없이 벌어졌고, 손님의 입보다 손에 더 신경을 써야 하는 직원들의 주문 실수는 잦았다. 접시와 포크는 돌아올 줄 몰랐고 늘어나는 운영비는 예상외의 큰 손실을 만들기 일쑤였다.

이에 맥도널드 형제는 드라이브스루와는 완전히 다른, 이전에 없던 새로운 방식의 레스토랑을 만들어 내기에 이른다. 맥도널드 형제는 주방의 모든 생산 라인을 주문형으로 제작하고 일회용 포장 용기를 들여왔다. 주문한 모든 음식은 30초 내에 손님의 손으로 넘어갔고, 음식을 받아 든 손님은 그 자리에서 포장지를 벗겨 맛있는 햄버거를 맛봤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이 놀랍게도 편리한 햄버거와 감자튀김을 맛보기 위한 손님들로 가게는 북적였다.

여기, 무겁고 크고 값도 나가는데 인기도 없는 밀크셰이크 기계에 배팅한 한 남자가 있다. 그러나 드라이브스루 시스템에서 밀크셰이크는 사치였다. 주문한 음식도 20분 이상 기다려야 받을 수 있는 마당에 밀크셰이크까지 기다려야 하는 상황을 원하는 이는 없었다. 자동차 트렁크에 밀크셰이크 기계를 싣고 전전하던 레이는 어느 날 대량 주문을 받게 된다. 인기도 없으면서 자리만 차지하는 밀크셰이크 기계를 대량 구매하는 이들이 있다니. 레이는 구매자가 미치지 않고서야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고 생각했다. 

먼 길을 달려 캘리포니아주에 위치한 맥도널드 형제의 가게를 마주한 레이의 표정은 미지의 황금 대륙을 발견한 탐험가의 그것과 같았다. 상상도 못한 새로운 형태의 돈 냄새를 맡은 얼빠진, 그러면서도 잔뜩 흥분된 표정을 한 이 남자는 온몸으로 외치고 있었다. 저것이 갖고 싶다고.

레이의 일 진행 방식은 완벽하지도, 그다지 철저하지도 않다. 그는 불도저 같은 추진력과 실행력을 가졌지만, 치밀하거나 섬세하지는 않다. 덧붙여 무언가를 창조해 내는 능력 역시 부족하다. 그래서 레이의 수완과 능력은 불이 들어오지 않는 전구와도 같다. 그러나 괜찮다. 얄미울 만큼 뻔뻔스러운 그 자신의 말처럼 레이는 포착에 능하고, 그에게 기꺼이 전력을 공급할 이를 끌어들일 힘을 가졌다. 그는 맥도널드 형제는 몰랐던 황금 아치의 가치를 포착했고, 이를 십자가처럼 기능하게 하리라 다짐했다. 



밀고 나갈 것인가, 밀려날 것인가


레이는 자신의 욕망을 위해 급진적 변화를 택했다. 그는 상류층과 어울리는 대신, 일자리를 간절히 소망하는 가난하지만 성실한 중산층으로 타깃을 옮겼다. 레이의 행보는 미국식 자본주의 그 자체였다. '아메리칸드림'을 외치던 1950년대 허울 좋은 미국의 자본주의처럼 레이의 급진적 변화는 중산층의 욕망을 거침없이 파고들었다. 여기에서 멈추지 않고, 그는 효율적이지 않다고 생각되는 모든 것을 바꿔 나갔다. 마치 사업 전략을 바꾸듯 아내를 바꿨고, 임대료로 모든 것을 쥐고 흔들 수 있는 땅으로 가치를 옮겨갔다. 맥도널드 형제와의 신임까지 져버렸다. 

레이는 황금 아치 왕국을 건설할 새로운 동료들과 함께 승승장구했다. 그는 더 이상 누군가에게 제안을 하는 입장이 아니었다. 반면  맥도널드 형제는 모든 것을 잃었다. 계약서를 지나치게 신뢰한 탓이다. 사실 그들의 신뢰는 타당하다. 계약서가 가진 힘이 말 한마디로 뒤바꿀 수 있을 만큼 가느다랗고 연약하다면 계약서라는 건 애초부터 의미가 없으니 말이다. 그러나 레이의 야망을 그깟 계약서가 통제할 수는 없었다. 정신 차려보니 레이는 이미 상대하기에 너무 거대한 상대가 되어 있었다. 최후의 순간에 맥도널드 형제가 이 뱀 같은 남자와 '구두 계약'을 체결하던 모습이 쉽게 잊히지 않는다. 저들은 포기한 걸까, 멍청한 걸까. 

이쯤 되니 가치의 혼란이 밀려온다. 만약 지금의 내가 8살 어린아이였다면, 나는 주저 없이 레이 크록을 비난했을 것이다. 나쁜 아저씨, 도둑놈이라 그를 욕하며 불쌍한 맥도널드 형제의 편을 들었을 것이다. 엄마 손을 잡고 당분간 맥도널드는 가지 않을 것이라 외쳤을지도 모른다. 맥도널드 형제의 흔적을 싹 지워버린 맥도널드는 진짜 맥도널드가 아니라고 말이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신자유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20대의 나는 레이 크록을 비난하는 것도, 맥도널드 형제를 동정하는 것도 어렵다. 맥도널드 왕국이 어떻게 건설되었는지를, 그 속에서 부당하게 배제되고 패배자로 전락하는 누군가의 삶을 목격하고도 말이다. 너무 많은 세상을 봤다. 재수 없어도 똑똑하고 능력 있는 놈들 곁이 안락하다는 건 부정하기 힘들다. 영화를 보고 난 후에 몰려오는 찜찜한 감정은 정(正) 도를 판단할 수 없는 자신의 모습에서 기인한 것이 아닐까. 안타깝게도 현실은 레이 크록 같은 사람들이 살아가기에 좀 더 적절한 구도를 갖춰가고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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