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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ndaleena Jul 11. 2018

그럴싸한 치유와 로망의 배제

사적인 영화일기, 오버 더 펜스

* 영화에 대한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 이미지 출처: 영화 <오버 더 펜스>



사적인 영화일기, <오버 더 펜스>


요즘 부쩍 '보통'이라는 단어를 해체하는 것에 즐거움을 느낀다. 보통인 것이 보통인 아니기 때문이다. 가장 평범하고 보편적임을 가장한 '보통'이라는 말은 아이러니하게도 다가가기가 쉽지 않다. 보통 사람처럼 살아가는 게, 남들 같은 삶을 사는 게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듯이 말이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보통의 삶을 갈망하고 선망한다. 

     평범함, 보통, 보편성 등의 개념은 다수의 입장에서 정립되고 서술된다. 모든 언어가 그러하듯 이 단어 역시 그 개념에 수많은 가치, 권력, 문화가 개입되어 있다. 그래서인지 다수를 지향하는 보통이라는 말은 자신과 비슷한 타인에게는 더없이 관대하고, 그렇지 않은 타인에게는 한없이 냉정하다. 


     결국 보통이라는 틀은 내가 속하고 싶은 집단, 속해있다고 믿고 싶은 집단이다. 때문에 보통의 삶을 갈망하는 우리는 조금이라도 그 관용 범위를 벗어난다고 생각하는 이들에게 차가워지고는 한다. 





나를 빌어하는, 남의 이야기


남의 이야기를 하는 건 참 쉽다. 일목요연하게 정리된 문장을 구사할 필요도, 논리성을 끌어올 필요도 없다. 심지어는 뱉어내는 말에 대한 책임을 온전히 껴안아야 한다는 부담도 덜하다. 어디에서 들었는데, 어디에서 읽었는데, 누가 그렇더라, 누가 그랬다더라. 

     낮에는 놀이공원에서 동물과 아이를 상대하는 '사토시'는 밤이 되면 유흥을 찾아 흘러들어온 남자를 상대한다. 술집에는 수많은 '다른 사람'이 공존한다. 외형이 다르고 이름이 다르고 나이도 다르다. 국물 요리보다는 마른 안주를 선호하는 이도 있고, 맥주보다 양주를 즐기는 이도 있다. 모두가 서로 다른 타인임에도 불구하고, 너무도 자연스레 사람들은 술잔을 기울이고 있는 많은 이들과 자신을 타인으로 분리하려 애쓰지 않는다. 단 한 사람, 사토시를 제외하고 말이다. 

     사람들은 사토시를 쉬운 여자라 부른다. 돈 몇 푼이면 그녀와 잘 수 있다며 자랑스레 자신의 경험담을 떠들어 대기도 한다. 사토시를 서술하는 말의 출처는 한정적이다. 거리에서건 가게에서건 마음 내키는 대로 정체를 알 수 없는 춤을 추는 사토시를 향한 시선에는 저급한 호기심과 약간의 동정, 그리고 거리감이 뒤섞여 있다. 사람들에게 사토시는 쉬운 여자이며 이상한 여자일 뿐이다. 

     '시라이와'는 무언가에 떠밀리듯이, 도망치듯이 마을로 흘러들어온 이방인이다. 낮에는 직업학교에서 일을 배우고, 일이 끝나면 도시락과 맥주 한 캔을 사서 귀가하는 것이 그의 일상이다. 시라이와의 일상은 언제나 규칙적이고 별일 없이 흘러간다. 


     그는 직업학교 동료들과 모두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동료들은 말수가 없지만 묵묵히 제 할 일은 다 해내는 시라이와를 좋아한다. 정작 시라이와가 어떤 이야기를 가지고 있는 사람인지에 대해서는 잘 알지는 못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다. 시라이와가 눈에 띌만한 '이상 행동'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점, 집단의 가치에 반하는 사람도 아니라는 점만이 중요하다. 다수의 기준과 관용에 반하지 않기에 사람들은 시라이와를 인정한다. 





허황, 그리고 거부의 몸짓


타인에게 이야기하고 싶지 않은 내면 깊숙한 부분의 진동을 사토시와 시라이와는 각기 다른 방식으로 표출하고 있는 것뿐이다. 사토시는 춤을 췄고, 시라이와는 침묵 속으로 몸을 숨겼다. 그러나 이 둘을 향한 시선의 차이는 매우 크다. 타인에 대한 선긋기의 기준은 오로지 자신, 그리고 자신이 속하고 싶어 하는 집단의 가치에 의해 이뤄지기 때문이다. 

     이는 같은 직업학교를 다니는 '모리'에 대한 동료들의 행동으로도 나타난다. 모리는 말이 없고 행동이 약간 굼뜬 젊은이이다. 직업학교의 많은 이들은 사교성이 떨어지는 성격으로 남들과 쉽게 어울리지 못하는 모리를 무시하거나 조롱한다. 혹은 아예 관심을 두지 않는다. 보편적이라 생각하지 않는 이들에게, 집단에 속하지 못하는 이들에게 우리는 이토록 냉정하고 차갑다. 보편성은 권위적이다. 

     시라이와 같은 남자가 설마 사토시 같은 여자를 만나겠어? 의구심 가득한 타인의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시라이와는 난해한 춤사위를 벌이고 있는 사토시에게 다가간다. '시라이와 같은' 남자, '사토시 같은' 여자라는 정의는 결국 타인에 의한 것이다. 사랑을 갈구하는 여자와 사랑을 잃은 남자의 서사에 누군가의 삶을 명명하고 구분하고 제한하는 허황된 몸짓은 중요하지 않다. 

     <오버 더 펜스>는 로맨스의 공식을 대입해 보면 다소 공허한 영화이기는 하다. 
뭔가 눈에 띌만한 로맨스적 결말을 만들어 내지 않은 채 입을 다물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럴싸한 치유와 로망을 배제한 영화는 그만의 충분한 가치가 있다. 시라이와와 사토시가 가진 결핍의 존재를 명확하게 정의 내리려 하거나, 속까지 뒤집어 보여주려 하지 않는다. 보통의 범주를 굳이 따지려 들지 않고 결핍을 인정한다. 보편성의 논리를 끌어들이지 않아 통쾌하기까지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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