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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ndaleena Sep 10. 2017

'나'에 관한 모든 건 참 어렵다

사적인 영화일기, 토니 에드만

* 영화에 대한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 이미지 출처: 영화 <토니 에드만>



사적인 영화일기 <토니 에드만>


"일에 매몰된 삶을 사는 딸과 정반대의 삶을 사는 아버지. 둘 사이의 갈라진 틈은 어느 순간 딸의 일상에 개입한 토니 에드만에 의해 회복되고 딸은 인생의 진짜 가치에 대해 배워간다." 

     과연 이 영화를 앞의 문장처럼 설명하는 것이 가능하기는 할까. <토니 에드만>은 '아버지와 딸'이라는 관계의 평화로운 회복과 가족에 대한 의미의 복기, 그리고 주변과 더불어 살아가는 인생의 진짜 가치에 대해 배우는 영화로 한정할 수 없다. 
영화는 치밀하고 날카롭게 인간의 '관계'를 파고든다. 삶과 죽음, 권력 구조, 아버지와 딸, 타인과 지인, 다른 세대 등으로 구분할 수 있는 삶 속의 다양한 관계를 면밀히 살피고 세련되게 드러낸다. 

     아버지와 딸의 따뜻한 화합과 화해를 내세우거나 기대했다면 글쎄. <토니 에드만>은 한바탕 유머 대잔치 속에서도 섬뜩하리만큼 날카롭고 사실적인 시선을 잃지 않는 놀라운 영화이다. 





가족


'이네스'는 자신의 커리어를 무엇보다 중요시하는 사람이다. 개인의 사적 영역보다 공적 업무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것이 익숙하고, 그것이 부당하다거나 억울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일을 위해 고향을 떠난 지 오래인 이네스에게 집과 가족은 편안한 안식처라기보다 언제 한 번 찾아가야 하는 의무감 같은 존재일 뿐이다. 반면 아버지 '빈프리트'의 삶은 딸의 것과 정반대이다. 그는 고향을 떠나본 적도 없고 일에 치여 사는 딸의 삶을 긍정적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동네의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아주 오랜 세월 음악을 가르치며 살아온 빈프리트가 동경하는 삶은 '유머'를 잃지 않는 삶이다.  

     그런 빈프리트가 공집합이라고는 혈연관계뿐인 이네스의 삶에 개입하기 시작했다. 그는 반려견의 죽음 이후 휴가를 얻어 무작정 딸이 일하고 있는
 루마니아로 날아갔다. 이네스는 거래처 사람과 중요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대뜸 난입해 초를 치기도 하는 아버지가 반갑지 않다. 가당치도 않은 농담을 던지는 아버지가 밉기도 하다. 이 민망하고 난처한 상황은 끊임없이 반복된다. 

     가족만큼 양가적인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존재가 어디 있을까. 혹은 가족 때문에 민망하고 부끄러웠던 경험이 없었던 사람이 있기는 할까. 이네스의 곁을 맴돌며 그녀의 동료와 친구들에게 자신을 독일 대사로, 컨설턴트로 소개하며 시답지 않은 농담을 던지는 빈프리트(혹은 토니 에드만)의 존재가 '딸'의 입장에서 결코 반가울 리 없다는 것은 같은 '딸'로서 충분히 공감할 수 있다. 

     기타노 다케시는 말했다. 가족이란 '누가 안 볼 때 내다 버리고 싶은 존재'라고. 가족은 분명 소중한 존재이다. 가족의 부재는 그 존재를 그립게 하고, 애틋하게 한다. 그러나 가족과 살을 부대껴 가며 살아본 이들은 알 수 있을 것이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삶의 문제를 절대적으로 용서하고 용인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가족은 때로 나의 감정을 극단으로 치닫게 만드는 존재이고, 갈등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토니 에드만>는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발생하는 양가적인 감정을 놓치지 않고 날카롭게 파고든다. 





인생의 가치?


워커홀릭 딸이 순간의 것에 집착하다 과거와 현재, 미래를 모두 보살피지 못하는 것을 염려한 아버지가 딸에게 인생의 진정한 가치를 전달하는 결말로 영화를 한정할 수 없는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다. 의치를 착용하고 가발을 뒤집어쓴 채 시답지 않은 농담을 던지는 '토니 에드만'이 아닌 진짜 빈프리트의 모습으로 아버지는 딸에게 날카로운 한 마디를 던진다. "네가 그러고도 인간이냐"고 묻는 그의 외침은 일에 치여 아버지를 외면하거나 부속품 취급하는 딸에게 가하는 그의 본심이었다. 

     고객의 요구에 맞게 당장이라도 누군가를 실직자로 만들어 버리는 것, 아무런 감정 없이 그러한 일을 해내는 것이 이네스의 일이다. 철저하게 냉정하고, 완벽하게 권력지향적이다. 누군가를 부리는데 거침이 없는 그녀의 모습은 실용적이지만 차갑기 그지없다. 상대적 기득권을 맘껏 휘두르는 비인간적인 존재로 보이기까지 한다. 그런 그녀에게는 가족의 소중함도, 아버지에 대한 사랑도, 더불어 사는 삶의 의미도, 주변을 돌아보는 따뜻한 마음씨도, 최소한의 도덕성도 없는 걸까. 그렇다면 그녀와 정반대의 삶은 사는 빈프리트는 인간적이고 도덕적인 존재일까.

     이 두 사람이 서로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힘든 이유에는 세대적 특성이 진하게 깔려 있다. 이네스가 전형적인 신자유주의 세대의 특성을 지닌 인물인 반면, 아버지 빈프리트는 신자유주의 세대와 극점에 서있는 68세대 사람이다
. 둘 사이의 가치 충돌은 일정 부분 세대의 특성에 기인한다. '요즘 젊은이들은 말이야'로 운을 떼는 말에 학을 떼 본 직간접적 경험이 많다. 동시대이자 전혀 다른 세대를 살아가고 있는 청년층과 중장년층 그리고 노년층은 서로를 이해하는 것이 너무도 어렵다. 

     자본주의적이고 경쟁적인 시스템 한가운데 떨어져 살고 있는 이들에게 이네스는 어느 정도 선망의 캐릭터이다. 자신의 일을 누구보다 열심히 하고 있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누군가에게 이네스는 무감각의 일하는 기계일 것이다. 특유의 낙관적이고 낙천적인 성질은 여유를 잃은 치열한 삶을 이해하기 힘들다. 빈프리트는 당장 일자리를 잃고 마을마저 잃게 된 이들에게 '유머'를 잃지 말라는 말을 건넨다. 화장실을 사용하게 해 준 이에게 일종의 감사의 표시로 돈을 건네기도 한다. 이네스의 눈에 그의 행동은 끔찍하다. 당장 삶의 터전을 잃게 될 이들에게 유머를 잃지 말라니. 거기에 돈까지 얹어 주고 오다니. 


     이네스의 시선은 좁힐 수 없는 세대의 틈과 옳고 그름을 따질 수 없는 근원적 차이에 직면하게 한다. 이 둘의 관계를 두고 누가 더 인간적인가, 누가 더 인간성을 상실하지 않았느냐, 누구의 관점이 더 가치 있는가 따위의 논쟁은 애초에 의미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혹은 그럴 수밖에 없다면


서로를 이해하는 것도 너무 어려운 이 둘이 닮아가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이네스는 아버지의 모자와 의치를 따라 착용하고 아버지가 좋아할 법한 사진을 남기는 데 동조한다. 그러나 사진 촬영 이후 그녀는 그것을 벗어버린다. 벗어버린 모자와 의치처럼 분명 이네스는 아버지처럼 살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조금씩 서로를 인정해 간다. 이네스는 토니 에드만으로 변신하는 빈프리트의 장난에 장단을 맞추기 시작한다.

     그녀는 토니 에드만을 자신의 은밀한 마약 파티에 초대하기도 하고, 거래처에 대동하기도 한다. 이네스의 행동을 자기 파괴적인 면모라 해야 할지, 맞장구라고 해야 할지 어딘가 모호하기는 하다. 그러나 분명한 건 이네스의 내면에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그녀에게서는 토니 에드만이 발생시키는 변화를 전적으로 거부하려는 모습이 나타나지 않는다. 

     이네스에게 일어나는 변화의 극점은 '누드 파티'이다. 그녀의 장난은 일상적이고 습관적인 아버지의 것과 다르다. 번아웃 상태에 도달한 것처럼 침대 위에 온몸을 쭉 늘어트렸다가 가운을 집어 입는 이네스에게서 그녀가 벌인 누드 파티가 상당히 충동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그녀가 자신도 모른 채 쌓여가던 피로와 탈력감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해방감이다. 토니 에드만처럼 자신의 모습을 바꿔버리는, 즉 옷을 던져 벗어버리는 장난스러운 방식으로 이네스는 잠시나마 이 해방감을 두려움 없이 마주해 보기로 한 것이다. 





나를 좀 더


이네스가 아버지의 반주에 맞춰 'Great love of all'을 부르는 대목은 모두에게 잊을 수 없는 장면일 것이다. 원치 않는 상황에 노래까지 부르게 된 그녀가 쥐어짜 내듯이, 고함을 치듯이 부르는 이 노래의 가사는 곱씹어 볼수록 그 의미가 깊다. 어쩌면 영화의 메시지를 관통하는 대목일지도 모르겠다. 

     가장 위대한 사랑은 자신을 사랑하는 법이라는데, 그건 참 어렵다. 토니 에드만으로 위장하는 것을 즐기는 빈프리트를 생각하면 이 메시지가 더욱 심상치 않게 여겨진다. 토니 에드만은 빈프리트가 만들어 낸 가상의 인물이다. 빈프리트는 자신을 감춘 상태에서 비로소 자유를 느끼는 사람 같다. 토니 에드만일 때의 그는 거침이 없다. 혹자는 이런 빈프리트의 모습을 보고 그의 유머가 마치 '비명'처럼 느껴졌다고 말했다. 그의 말마따나 토니 에드만의 빈프리트는 가장 우스꽝스럽고, 동시에 가장 슬프다. 토니 에드만은 외로움과 고독함에 질식할 것 같은 삶을 사는 빈프리트가 자신을 감추기 위해, 동시에 드러내기 위해 만들어 낸 또 다른 자아처럼 보인다. 그의 의치와 가발은 마치 현대인들의 보이지 않는 가면처럼 기능한다. 감출수록 대담해진다. 

     온몸을 털로 꽁꽁 싸맨 쿠케리의 모습에서 빈프리트는 딸을 품에 안을 수 있었고, 딸은 그런 아버지의 품에서 잠시간의 따뜻한 온기를 얻어갈 수 있었다. 그러나 부녀의 포옹은 잠시뿐이었다. 이네스는 어딘가에 홀린 사람처럼 나타났다 홀린 듯이 사라진다. 따뜻했던 포옹은 마치 꿈같다. 

     잔인하게도 딸과의 포옹 뒤에 아름다운 재회를 상기하며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는 빈프리트는 없었다. 그는 호흡 곤란을 겪으며 잔디밭 위에 자신의 몸을 뉘어버린다. 이네스만큼이나 빈프리트는 위태롭다. 그는 너무 고독하고 쓸쓸하다. 토니 에드만도 빈 프리트도 죽은 존재 같다.

     영화를 보고 있자면 토니 에드만이 아닌, 빈프리트로서의 그가 미치도록 그립고 또 그리워진다.
 이네스가 자신을 갉아먹던 피로와 상실을 인정하고 아버지의 품 안에서 잠시간의 따뜻한 온기를 느껴가듯, 빈프리트가 
의치와 가발에서 벗어나 빈프리트로서의 삶에서 안정과 평화를 느끼길 간절히 바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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